이경림 교육학과 박사과정

이경림

교육학과 박사과정

대학에 입학하고 난 후, 왜 교육학을 전공으로 택하게 됐냐는 질문을 숱하게 받았다.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진로고민이 한창이던 고등학생 이학년 때 EBS 다큐멘터리 아이들의 사생활 편을 아주 열심히 봤기 때문이다. 교육학과에 가면 그런 걸 공부할 수 있게 되는 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교육학과에 진학했다.(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나는 아동 혹은 청소년의 심리 발달을 연구하지 않는다).이 때, EBS 다큐멘터리 아이들의 사생활 편을 열심히 봐서 교육학과에 진학하게 됐다는 나의 기억을 듣는 여러분은 나의 대답을 얼마나 신뢰하는가?

교육학과를 전공으로 선택하는 데에는 수많은 사건들이 개입되었을 것이다. EBS 다큐멘터리를 보고 교육학을 생각하게 된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EBS 다큐멘터리에 대한 말은 좀 허무맹랑하고, 아마 당시 내 수능점수가 교육학과에 원서를 넣어 볼 정도가 됐기 때문이라는 게 가장 강력한 원인일 수도 있다. 사범대가 여자애가 진학하기에 그럭저럭 적당하지 않느냐는, 고리타분한 성별 고정관념이 또한 적잖게 한 몫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 나를 스쳐갔던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굳이 ‘EBS 다큐멘터리 시청 경험’을 내 역사로 ‘뽑은 것이다.’ 그렇다면 내 대답은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신뢰하기 어려운 대답이 되는가?

기억과 그에 대한 서술 또는 구술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신뢰하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내 자신에 대해 아무리 잘 기억하고 열심히 말한다고 해도 누군가가 정말 그러하냐고 추궁하면 주춤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 자신을 말하는 데 중요한 것은 현대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팩트가 아니라는 바로 그 점에서, 스스로의 기억을 쓰고 말하는 일은 소중하고 중대한 일이 된다. 너의 기억이 정말 그러하냐고, 그런 기억들로 구성된 네가 정말 너 자신이냐고 묻는 것이 합리적인 질문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애는 주관적인 구성물이다. 선택된 기억들로 삶의 궤적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있어 개인의 삶이 의미를 획득한다. 브래디라는 학자는 자신의 생애와 기억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그저 과거의 사실들이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는 자신, 하나로 정렬되는 자신, 상상되는 자신으로 자아가 펼쳐진다고 말한 바 있다. 스스로가 지나온 역사를 말하면서 자신이 기억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서술하고, 그러면서 자아의 일관성을 획득하기 위해 규칙과 질서를 통해 자아를 정렬하고,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 역사는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서술과 구술의 과정에서 구성된다. 그리고 성인교육 영역에서는 기꺼이 그 과정을 중요한 학습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생애를 구성함으로써 나 자신을 배우는 중대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질문은 결국 현재의 나를 묻는 질문이고, 내가 말하는 내 과거는 결국 선택된 과거이다. 누군가 자신의 과거 영웅담을 늘어놓는 걸 들으면서 ‘오바하네’ 하고 생각한 경험, 한두 번씩은 있을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지난 과거를 말한다. 사람들은 사방에서 내가 그때 어떻게 잘났었고 어떻게 지질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런 잘났거나 지질한 과거사는 진실의 측면에선 거의 의미가 없고, 오히려 현재의 나를 말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어떤 과거를 말한다는 것이 사실은 지금 말하고 있는 현재의 나를 다룬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과정은 자신의 과거를 말함으로써 자신의 현재를 배우는 일이다. 여러분은 어떤 사건을 선택하는가? 어떤 사건들로 자신에 대한 어떤 서사를 엮어내는가? 그렇게 만들어내는 여러분의 과거사가 여러분의 과거가 아닌 현재를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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