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형 사회부장
강지형
사회부장

녹두거리 큰길가에 보면 헌책방이 하나 있다. 평일 오후에 장을 보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다가 헌책방의 문이 열려있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스르륵 안으로 들어가 한두 권씩 책을 사오곤 한다. 좋은 책을 싼 값에 살 수 있다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도 난 그 옛날 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징들을 좋아한다. 누렇게 뜬 종이, 덴덕스러운 모서리에 옅게 슬어있는 곰팡이, 바탕체의 조상 격인 특이한 글꼴, 쉬운 한글 두고 굳이 한자로 적어놓은 단어들, ‘-읍니다’와 같은 옛날 맞춤법, 따옴표 대신 쓰인 낫표와 같은 요소들로 가득한 옛날 책은 가독성이 약간 떨어지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잘 몰입할 수 있게 된다.(이것은 내 뇌피셜이 아니라, 미국 UCLA 연구팀 등에 의해 실험적으로 검증된 팩트다.)

책의 내용도 옛날 책들에 난 더 매력을 느낀다. 헌책방에 들렀다가 좋은 수필집을 하나 건진 날이면 특히나 기분이 좋다. 최근에도 헌책방에 들렀다가 마광수의 수필집 『성애론』을 발견하곤 신이 나서 5000원에 바로 사 들고 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인 수필들을 읽다 보면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인 주장에 감탄하며 내용을 곱씹을 때도 있고, 반대로 ‘몇 십 년 전만 해도 이런 생각을 했구나’ 하며 아카이브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아기자기한 표지에 SNS 감성을 자극할 몇 마디 말들로 찬 가량맞은 양산형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지금, 비록 디자인과 말씨는 투박하지만 속은 꽉 찬 옛날 책들은 신문사에 구어박혀 읽기에 제격이다.

옛날 텍스트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나는 뭔가 가리사니가 서지 않을 때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한 사람이 있지는 않나 옛날 철학자들의 글을 찾아본다. 그러면 놀랍게도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 존재한다. 내가 나름대로 깊이 고민하며 끙끙 앓던 철학적 문제가, 사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시작해 이미 가능한 거의 모든 경우의 수가 검토된 문제이며, 내가 무슨 답을 내리든 간에 이미 어떤 사람이 비슷한 내용을 주제로 책을 한 편 써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의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지금 내가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건 오직 나만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내 머릿속에 발붙일 자리가 없게 됐다. 몇 천 년 간 누적돼온 수많은 선현들의 지혜를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논어』 『맹자』와 같은 유교 경전이나 『성경』과 같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지침으로 삼아온 글들은 더더욱 주옥같다.

이렇게 옛것들을 워낙 좋아하는 나이기에,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이 “지형이는 1899년생이라서 100년 짬밥으로 서울대 의대 붙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라며 놀리기도 했다. 일부러 다른 사람 눈에 띄려 기행을 일삼는 것은 아니지만(다른 사람 눈에 띄려 기행을 일삼는 ‘관종짓’을 해선 안 된다는 내용도 『격몽요결』에 나온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굳이 이런 내 취향의 원천을 찾자면, 노래든 문학이든 ‘새롭게 나오는 것’들도 결국 과거의 변주에 불과할 것이란 내 가치관 때문이라 하겠다. 내가 삶에 지침으로 삼거나 앞으로 삶의 지혜랍시고 깨달을 내용들은 이미 웬만한 고전에 실려 있을 것이라는, 상당히 회의주의적인 가치관이다. 앗,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가치관마저 『성경』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 왕이 이미 한 권에 걸쳐 논한 바 있다. 아무래도 글의 말미는 그의 말로 갈음하는 게 좋겠다. “이미 있던 것이 뒤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뒤에 다시 하리니,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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