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장마철 같은 계절이지만 추석이 지나니 가을이 완연하다. 매미 소리 뚝 그치고 귀뚜라미 소리 요란한 이 계절에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낙엽, 나목, 사과, 외로움…. 하지만 내마음을 옥죄고 있는 회한같은 것은 없을까. 길가에서 자신의 담뱃재가 날아가 남의 얼굴에 묻어도 태연하게 걷고 있는 사람을 보면 불쾌감은 느끼겠지만 깊은 한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멀쩡하게 생겼는데 인품은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실망감이 고작이다.


정작 내가 미움과 적대감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누구 때문일까. 아마도 오랫동안 사귀고 정을 나누던 그 사람 때문일 것이다. 그 친구에게 마음도 털어놓고 기대와 소망, 고민도 나누고, 또 진지한 얘기, 구차한 얘기, 내밀한 얘기, 시시껄렁한 얘기, 눈물나는 얘기, 재미있는 얘기들도 나누었는데, 어느 날 그가 말도 없이 떠난 것이다. 또 촛불 두 개를 켜놓고 사랑을 맹서하며 커플링을 교환하고 만남의 100일째를 기념했는데 101일째 되는 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사랑의 약속을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새처럼 멀리 날아가 버리다니. 또 누구는 내가 망설이고 망설이다 털어놓은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떠들고 다녔다. 내가 정을 주던 그 친구가 그런 몹쓸 짓을 하다니. 어떻게 그 친구를 용서할 수 있을까. 섭섭한 마음, 배신감,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마음의 상처가 다시 덧나며 이 가을에 외로움을 더하는 것은 아닐까. 그 미움은 한동안 사라졌다가 갑자기 활화산처럼 불을 내뿜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이런 불행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구나 하는 회한과 원망도 가득해진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정과 사랑은 애틋하지만 극심한 증오와 고통 또한 피해가기 어렵다. 먼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한테서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 미움이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더 치열하다는 것, 삶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다정한 관계 속에서도 타인처럼 낯설고 원수처럼 미워하고 나그네처럼 외로워지는 것은 수수께끼지만 체감하는 현실이다. 이방인과 남남 사이에 뜨거운 사랑이 있을 수는 없지만 미움도 잠깐뿐이다. 하지만 가까운 사이에는 많이 사랑했기에 기대도 컸고 그 큰 기대가 배반당했던 만큼 미움도 커진다. 이것이야말로 사랑 넘쳐 흐르는 곳에 미움 또한 넘쳐 흐르는 이유다. 그런데 그 미움이 내 자신에게 그렇게 당혹스러운 것은 바로 상대가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이기 때문일 터이다. 그 때문에 남에게 말하기도 어렵고 혼자서 눈물 흘리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된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미움의 비밀. 왜 사랑의 가슴앓이만 있을까. 미움의 가슴앓이도 이에 못지않다.


하지만 그런 섭섭함과 미운 정을 두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음 한 구석에 미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우정을 나눌 수 있을까. 마침 가을은 내 마음안에서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는 증오와 회한을 떨쳐버리기에 좋은 계절이다. 잡았던 매미를 손에서 놓아주듯이…. 그렇다면 화해의 편지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9월의 어느 날을 정해 옛날에는 아주 가까웠던, 지금은 서먹서먹하고 미움으로 가득한 사이가 되어버린 옛친구의 주소를 찾아내어 그에게 사과도 보내고 이메일을 보내면 어떨까. 빨간 능금이 익어가는 계절인 가을, 오래 전의 노래가 불현듯 생각난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박효종
사범대 교수·국민윤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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