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훈 기자사회부
김용훈 기자
사회부

이룬 것 없이 권태로운 중이다. 여전히 초고는 늦고, 기사는 썩 만족스럽지 않고, 종종 취재원에게 모진 말을 듣는다. 기사를 꾹꾹 눌러쓰는 일에 싫증 나기에는 아직 매 순간이 새롭게 힘든데, 우스운 일이다. 이토록 하루가 지난함에도 지루함을 느낀다. 그 까닭은 아마 기사를 쓸 때마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지 싶다. 

취재를 나가 전문가에게 말씀 물으니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다. 그의 말마따나 학생운동은 시대의 변화를 맞아 침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에게 물으니 그의 이야기도 옳은 것만 같다. 새로운 시대를 목격한 운동 주체가 보다 유연했다면 지금처럼 크나큰 불신을 직면했을까. 혼란스럽지만 잠시 고민을 접고, 그래서 대학가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묻는다. 혹자는 학생들이 이익이 아닌 대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충고했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새롭게 만난 누군가는 정의가 이익에 접합되지 않는 한 실현될 리 없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이야기를 주섬주섬 모아온 새벽에, 녹음을 들으며 대화를 적어 내려간다. 반투명한 창문에 가로등 불빛이 깨져 들어올 즈음, 바로 그때 나는 권태를 느끼곤 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여러 다른 목소리를 지면에 담고 배치할 뿐이다. 판단은 독자에게 미룬다. 내가 생각한 바를 기사에 녹이려 한 적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내 내 생각은 논리도 사실도 갖추지 못한 초라한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판단을 내릴 통찰이 없고, 발품을 팔아 보다 확고한 사실을 발굴할 부지런함도 없다. 그렇다면 당장 펜 밑에 놓인 기사는 무엇인가. 왕의 말을 기록하는 사관(史官)마냥 전문가의 이야기를 옮겨 적는 탓에, 기사는 졸지에 현재의 가치를 잃은 쓸모없는 사료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사료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그래서 영원히 읽히지 않는 문장일지도 모르겠다. 

가야할 길을 찬란한 별이 비춰준 시대, 한 문학 사상가는 그런 시기를 동경했다더라. 칠흑 속에서 옳은 방향을 찾느라 수없이 더듬고 넘어질 일이 없는 시대일 것이다. 무례한 생각이지만, 불과 몇 십 년 전 학생이 마주한 시대가 그러지 않았나 싶다. 혈루로 얼룩진 암울한 세상이되 그 만큼 명명백백한 빛이 하나의 길을 비췄을 것이다. 하늘을 수놓은 눈부신 별빛이 학생으로 하여금 할 일을 일러줬을 것이고,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헌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과거를 떠올리고 부러워하곤 한다. 

어슴푸레한 불빛만이 있는 현재, 무엇도 정의라 말하지 못하고 어떤 길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불빛 중 그나마 선명한 것을 등잔 삼아 펜을 끄적인다. 무언가를 써 내려가면서도 등잔이 꺼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이 기사를 기획했다. 확고한 신념을 지닌 운동가들이 가리키는 별을 보고 싶었다. 혹은 그들의 손가락만이라도 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를 보니 여전히 권태로운 실수뿐이다. 어디서 별 하나 떨어져 발치를 비춰주길 염치없이 빌어본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