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구 정치외교학부 석사과정
한석구
정치외교학부 석사과정

어쩌다보니 올해 초부터 운 좋게 방송국에서 피디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던 공부를 미처 매듭짓지도 못한 채 정신없이 새 ‘문법’들을 배우는 중입니다. 학교란 안락한 울타리를 떠난 뒤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이 일은 이제껏 마주해왔던 삶과는 매우 달라서 매 순간 놀라게 됩니다. 예컨대 인간의 적개심을 온몸으로 마주해야만 하는 순간이 그렇습니다. 문전박대는 예사고, 심지어 말을 걸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 존재 자체를 무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 때도 생깁니다. 마음 아픈 사고들로 화제가 된 현장을 찾아가야 할 때 드는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인해 오가는 길 내내 마음을 졸이게 되죠. 이런저런 이유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다보면, 왠지 수명이 몇 년씩 줄어드는 것만 같습니다.

평소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을 만나고, 이들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그려내는 일은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지만 동시에 치러야 할 대가도 분명 있습니다. 새삼 그걸 느낄 때마다 무서워지는 것도 점점 더 많아집니다. 매번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들의 연장선상에서 타인의 고통, 혹은 분노와 같은 날것의 감정들을 온전히 받아내려 노력해보지만 시도조차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도전받는 자아정체성을 홀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면 진작 지나갔어야 할 사춘기가 다시 찾아온 것만 같습니다. 새롭게 삶을 배우는 과정에 자꾸 한단지보란 말을 입안에 머금게 되는 까닭도 그 때문이겠죠. 

깊게 공부할수록 나 자신이 뭘 모른다는 것만 명확해지는 공부처럼, 몸으로 직접 현장을 부딪치며 만나게 되는 사회 역시 볼수록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직접 마주한 뒤 스스로의 해석을 담아내는 과정은 너무나도 복잡한 작업입니다. 잎이 무성한 나무를 한참 쳐다보다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그 가지를 쳐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스스로의 무지 때문에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죠. 저녁 메뉴조차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모두에게 보여줘야만 할 메시지를 골라야만 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이제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기어 다니게” 되면서 다시 바라보게 된 세상은 그럼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곳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말하고 쓰는 법부터 배워야하지만 이는 학교에서 공부를 조금이라도 더 해봤던 사람한텐 사실 익숙한 일이죠. 그렇게 수많은 말과 글을 통해 읽어왔던 세상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이 세상이란 ‘텍스트’를 다시 배워온 공부법을 통해 읽어보려 노력을 해봅니다. 전혀 달라 보이기만 사실 그 본질은 다르지 않을 것이며, 결국 중요한 건 스스로 쌓아 올린 “내 자신만의 이야기”라는 생각의 끈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도 노력해봅니다. 그렇게 계속 걷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두 다리로 걷는 법 모두를 지켜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도 품어봅니다. 계속해서 걸을 의지만 가지고 있다면 말이죠. 

2월 말에 할 수 없을 수강신청 화면을 띄워놓은 채 멍하니 수업을 상상하면서 속으로 했던 다짐을 생각합니다. 계속해 온 공부가 이어질 수 있도록, 짧았지만 깊게 배운 마음가짐들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아마도 지금도 배움이 그리운 까닭은 스스로와 싸우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던 시간 동안 배웠던 것이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이겠죠. 

그렇기에 다시 걷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힘들 때마다 짧게라도 학교의 모두에게 배워왔던 기억들을 지키며 조금씩 발걸음을 떼어보고 있습니다. 저와는 달리 학교에서 분명하게 제대로 걷는 법을 배워 나올 ‘걸음법의 선배’들을 사회 어딘가에서 만날 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내 걸음이 비록 여전히 서툴다 해도 노력해왔다고 말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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