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랬다. 클리셰(cliche: 상투적인 표현)에 대한 경멸은, 손바닥만한 지적 소양으로 남들로부터 자신을 구분지으려는 유치한 댄디즘(dandyism)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러분은 지금 유치한 댄디 보이의 문장을 보고 계신다.


얼마 전 출간된 한 소설의 신문광고에는 동료 소설가의 다음과 같은 '주례사'가 실렸다. "이 소설은 자칫 생의 뇌관을 건드린다." 나는 이 문장이 좀 심심하다고 생각한다. '생의 뇌관'이라는 은유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써먹어서 너덜너덜해진 은유다. 안 쓰려면 모르겠거니와 이왕 쓰려면, 그것도 글쓰는 사람이 쓰는 것이라면, 그 은유는 좀 재미있어야 하지 않겠는지.


심심한 문장들의 행진을 보라. "나는 이 소설보다 더 웅숭깊은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는 소설을 알지 못한다" 하는 비평가들의 문장. '웅숭깊은'이라는 형용사를 보면 이젠 아무런 느낌도 없다. 말 하나가 또 이렇게 죽어가다니, 애도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나는 ∼ 알지 못한다"는 문장들에게, 나는 그 보다 더 진부한 감탄문을 '나는 알지 못한다'고 응수하고 싶다.

글을 쓰는 사람이면서도 ‘문장’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들은 독자를 심심하게 한다


성실한 소설가는 막노동의 노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국어사전을 뒤져 사라진, 또 사라져가는 우리말을 되살려 쓴다. 그의 소설은, 그 내용을 떠나, 그가 발굴한 말들 때문에 간이 맞는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더 고수인 사람을 알 것 같다. 그들은 막노동을 하지 않고도, 우리 주위에서 막 굴러다니는 말을 주워서 목걸이처럼 독자의 목에 걸어줄 줄 안다. 이 고수들의 재능은, 나같은 범인(凡人)에게는 부러운 것이고 또 부러워서 분하기까지 한 것이지만, 막노동보다 이 편이 더 재미있을 때가 많다.


창조적 구절들의 행진을 보라. 장석남의 두 번째 시집 표제는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다. 절묘하게 제자리를 찾은 이 '간신히'라는 부사의 맛. '체리 필터'의 〈낭만 고양이〉라는 노래의 제목의 맛. '낭만'이라는 죽은 말이 '고양이'와 박치기 하더니 막 살아 움직이는 이 맛. 오규원의 시 〈한 잎의 여자〉를 읽다보면 '여자'라는 말이 어느 순간 낯설어지고, 그 말은 마침내 우리가 처음 말을 배울 때처럼 신비로워지고 만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글을 쓰는 것이 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독자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면허증 같은 것이 있다면, 그 면허증은 "나는 이 지구상에서 한 번도 씌어진 적이 없는 문장을 써내겠다"는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글 쓰는 자의 존재 자체가 클리셰가 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고, 나 같은 범인들이 쓰는 언어는 날로 가난해질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댄디즘이라고 욕을 먹으면서도 글 쓰는 자의 무면허 운필(運筆)을 규탄하는 바이다.

권희철
인문대·석사과정·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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