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상업주의가 대두했고 소비문화가 확산됐다. 당시 유행의 선두주자였던 ‘모던걸’ ‘모던보이’는 쇼핑을 하기 위해 백화점에 갔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했으며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창경원에서 데이트하곤 했다. 그들이 여가를 보내던 이 장소들은 100여 년이 지난 2019년 현재에도 비슷한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대학신문』에서는 1920~30년대 경성 사람들의 여가 생활 방식을 들여다보고 이것이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지 살펴봤다.

 

새로움을 선사하고 고급을 팔다 - 백화점

일제강점기, 경성에는 많은 일본인이 살았다. 일본이 자국민을 경성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일본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식민지로 전파됐다. 백화점도 일본의 소비문화가 경성에 퍼짐에 따라 생겨난 일본식 근대 문화의 산물 중 하나다.

근대식 백화점은 경성부민의 소비 양상을 변화시켰다. 당시 백화점은 선진 고급 발명품을 접할 수 있다는 박람회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최병택 교수(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는 “근대식 백화점은 박람회와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며 “백화점을 통한 상품 소비가 최선진의 신문물을 접하는 행위로 느껴지게끔 하기 위해 박람회에서 물건을 전시하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백화점에서 고급 물품을 구매하는 행위는 남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가진 계층임을 상징했다”고 덧붙였다. 

경성의 근대 백화점 중 고급으로 유명했던 ‘미츠코시 백화점’은 물건이 고르기 어렵게 마구 쌓여 있던 기존의 시장과 달리 현대적인 방식으로 질서 있게 진열했다. 최 교수는 “식료품 매장의 경우 신선도와 위생을 강조하기 위해 깔끔한 용기에 담았고 소비자가 한 번 식료품을 구매할 때 살 법한 분량에 맞춰 식재료를 소량으로 포장했다”고 말했다. 백화점은 고객에게 물건을 선보이는 데 쇼윈도를 사용하기도 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미츠코시의 경우 미술 전문가를 따로 둬 쇼윈도를 장식했다. 미츠코시는 일정 수준 이상의 화려한 쇼윈도를 갖추고 있었지만 동시대 다른 백화점은 쇼윈도를 장식하는 것에 서툴렀다. 이에 백화점의 쇼윈도에 대한 지적이 당시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쇼 윈도우가 좁고 엷고 지저분하고 진열한 물건과 방법이 서투르다. (중략) 쇼윈도우 개조가 우선일 것 같다.” (작자 미상, 1931, 「경성 시내 양 백화점의 인상, 화신상회와 동아부인상회」, 『별건곤』 제45호) 

백화점은 전시회나 문화 강연을 여는 등 새로운 문화를 선도했다. 최 교수는 “어떤 백화점은 매년 4월 ‘아동 애호주간’이라는 이름으로 아동을 모아 꽃 구경 행사를 열었고 화신 백화점*의 경우 화목한 가정생활을 주제로 한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한 점 내에서 상품을 홍보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쇼프걸’(shopgirl)은 구경의 대상이었다. 특히 미츠코시 백화점의 쇼프걸은 많은 청년의 관심을 끌었다. 

“도색의 꿈을 가슴 속 깊이 갖춘 스마-트한 청년들이 물건 보기보다 거기서 나비같이 경쾌하게 써-비스하는 ‘쇼프껄’들을 바라보기에 정신없는 광경을 본다.”(작자 미상, 1934, 「결혼 시장을 차저서, 백화점의 미인 시장」, 『삼천리』 6권 5호) 

이렇듯 경성부민에게 다양한 문화를 소개했던 백화점은 파격적인 행사와 신문물로 사람들을 유혹했다. 실제로 당시 경품 추첨에 응모하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해보기 위해 백화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컨대 화신백화점은 경품으로 20여 평 상당의 ‘문화주택’을 걸었다. 이처럼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진행된 경품 행사는 과열 양상을 띠기도 했다. 엘리베이터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 『경성 탐정 이상』(2012)을 쓴 김재희 작가는 “엘리베이터가 생소해 타기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단순히 4층을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기 위해 백화점을 찾는 사람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미츠코시 백화점은 현재 국내에 있는 모든 백화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운영 방식을 채택했다. 최 교수는 “미츠코시 백화점은 현대의 백화점과 같이 철저한 정찰제를 실시했고 반품을 보장했으며 쿠폰과 상품권을 발행했다”고 설명했다. 근대적인 면모를 갖춘 미츠코시 백화점은 해방 직후 ‘동화백화점’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계속했다. 1963년 삼성이 이를 흡수한 후, 동화백화점은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이 됐다. 신세계 백화점은 현재 미츠코시 백화점의 건물을 그대로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1930년대 경성 미츠코시 백화점과 현재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세계 백화점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이다.사진 제공: 부산박물관, 「사진엽서로 보는 근대풍경 1」. 민속원, 2009.
1930년대 경성 미츠코시 백화점과 현재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세계 백화점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이다.사진 제공: 부산박물관, 「사진엽서로 보는 근대풍경 1」. 민속원, 2009.

 

환상의 나라 ‘창경원’으로 - 창경원

일제는 창경궁 내 왕실 건물 60여 채를 헐고 복합 놀이공원인 창경원을 조성했다. 출입통제구역이었던 왕궁이 입장료만 내면 출입할 수 있는 공공시설로 바뀐 것은 당시 경성 사람들에게 획기적인 변화였다. 이에 더해 수천 그루의 벚나무와 각종 동물은 경성 시민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김재희 작가는 “창경원은 당시 사람들에게 쉽게 볼 수 없는 타조, 두루미, 오랑우탄, 코끼리 등을 구경할 수 있고 열대와 아열대 식물 등 생소한 식물들을 접할 수 있는 낙원으로 인식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이면에는 왕궁을 유원지로 바꿈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격하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있었다.

창경원은 중간에 박물관, 북쪽에 식물원, 남쪽에 동물원으로 구성돼 있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곳에 활주탑(미끄럼틀)이 설치된 놀이터와 말운동장 등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까지 만들어져 가족 단위의 나들이 장소가 됐다. 

“서울에서는 유일한 아이들의 놀이터 창경원 아동 운동장에는 나선형 대활주탑이 불원간 시설되리라 한다. 이는 높이 15척 최신식의 활주탑으로서 조선서는 이것이 처음이라 한다.”(「창경원 아동운동장 나선형활주탑설비」, 『동아일보』, 1934년 6월 19일 자)

1924년부터 시작된 벚꽃놀이는 더 많은 사람을 창경원으로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도로를 따라 벚나무를 심어 마치 터널과 같은 형상을 이뤘고 사람들은 이를 ‘앵화 터널’이라고 불렀다. 또한 벚꽃 개화 시기에 맞춰 야간개장을 했던 창경원은 다양한 조명 효과와 함께 아름다운 밤 경관을 만들어냈다. 1920년대 초반에는 주말 관람객이 6천명을 조금 웃돌았지만 멋진 풍경을 보기 위해 창경원을 찾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며 1927년에는 하루 입장객만 15,000명을 넘겼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나들이객은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기 일쑤였다. 

“형형색색의 가지각색 옷을 입은 남자, 여자, 늙은이, 젊은이, 어린 애, 중국 사람, 서양 사람, 조선 사람, 기생, 여학생, 갈보, 망종, 월급쟁이, 집주름, 학생, 신사, 병정, 순사, 무엇 무엇… 이리하여 그 수가 많다는 형용을 초월하야 줄기줄기 쏠려 다닌다.”(작자 미상, 1931, 「본사 여기자의 불량신사 검거록」, 『별건곤』 40호) 

현재 창경궁에는 창경원의 식물원 대온실만이 복원돼 있다. 창경원 대온실은 174평 목조 유리 건물로 당시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문화재청은 이 웅장한 대온실을 제대로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창경원 관리소 이영훈 주무관은 “2016년부터 2년간 노후화된 목재 부분과 부식된 철제 부분을 보수했다”며 “특히 내부 타일은 철거 중에 그 원형을 발견해 타일 제조사의 옛 책자를 참고해서 그대로 재현해냈다”고 말했다. 현재 창경원 대온실은 100여 년 전과 별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과거 식물원 대온실과 이를 그대로 복원한 현재의 대온실 사진을 합성한 사진이다.사진 제공: 문화재청
과거 식물원 대온실과 이를 그대로 복원한 현재의 대온실 사진을 합성한 사진이다.사진 제공: 문화재청

 

커피에 예술을 곁들이다 - 다방

커피와 함께 탄생한 다방은 끽다점, 찻집, 티룸 등으로 불리며 외래 문물을 상징했다. 이곳에서는 커피를 마시는 것 이상의 문화생활이 이뤄졌다. 김재희 작가는 당시 다방을 “‘살롱’ 개념의 커피숍이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 귀족과 예술가의 정기적인 사교모임에서 비롯된 살롱처럼 경성의 문인이나 화가는 다방에 모여 교류했다. 오윤정 교수(계명대 국제지역학부)는 “다방에서는 최신 영화를 상영하거나 미술품을 전시하기도 해 예술인의 집합 장소로 기능했다”며 “작가 이상이 개업한 다방 ‘제비’에서는 구인회* 모임이 진행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말했다. 한편 부적절한 방향으로 다방 문화가 변질하기도 했다. 일부 다방에서 다방을 찾는 남성에게 여직원이 술을 따르는 문화가 생겨났다.

많은 다방 중 ‘낙랑파라’는 세련된 인테리어를 갖추고 손님에게 여러 가지 문화 콘텐츠를 제공해 다방의 전성기를 불러왔다. 

“낙랑파라는 2층을 화실로 사용했고, 1층 낙랑파라 널마루 위에 톱밥을 깔아 사막을 연상케 하였다. 금요일에는 빅터 음반의 신곡을 틀어주고 때로는 전람회도 개최했다.”(작자 미상, 1934, 「끽다점평판기」, 『삼천리』 6권 5호) 낙랑파라 사장인 화가 이순석은 데생을 걸어두고 명곡 연주회를 매주 두어 번 여는 등 다방을 문화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힘썼다.

경성 다방 역사상 최초로 흑자를 유지한 낙랑파라의 성공에는 자리 선정도 한 몫 했다. 오 교수는 “낙랑파라는 조선인이 주로 사는 북촌과 일본인이 주로 사는 남촌의 사이에 존재했기 때문에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가 찾았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성공의 주인을 생각해보면 장소를 대담한 곳에 앉힌 것이 의외로 성공해 내지인 손을 많이 끌 수 있었고…….”(노다객, 1938, 「경성다방성쇠기」, 『청색지』 1호)

그러나 비싼 커피 가격으로 인해 다방에 자주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최병택 교수는 “1930년대 중반에 커피 한 잔의 값이 13전에서 15전 정도로 회사원 평균 월급의 5% 수준이었다”며 “이에 더해 다방 직원에게 줘야 했던 팁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다방 순례는 하나의 취미로 인식되기도 했다. 최 교수는 “1930년대부터 전문학교* 학생들이 다방을 자주 찾았다”고 부연했다. 

2019년의 서울 시민에게 커피는 일상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커피 가격에 대한 부담도 상대적으로 덜해지면서 많은 사람이 휴식을 취하고 여가를 보내기 위해 카페를 찾는다. 현재 낙랑파라가 있던 장소를 마주 보는 곳에는 ‘스타벅스 소공동점’이 들어섰다.

 

경성 다방 낙랑파라의 내부 모습과 스타벅스 소공동점 내부 모습을 합성한 사진이다. 우측에 있는 사진은 스타벅스 소공동점의 외관이다.사진 제공: 오윤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33집, 「1930년대 경성 모더니스트들과 다방 낙랑파라」. 2017.
경성 다방 낙랑파라의 내부 모습과 스타벅스 소공동점 내부 모습을 합성한 사진이다. 우측에 있는 사진은 스타벅스 소공동점의 외관이다.사진 제공: 오윤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33집, 「1930년대 경성 모더니스트들과 다방 낙랑파라」. 2017.

함께 울고 웃으니 즐겁구나 - 영화관

종로 3가에 위치한 공연장이었던 ‘단성사’는 1910년대 중반 한국 영화의 선구자였던 박승필에 의해 인수돼 상설영화관으로 새롭게 단장됐다. 이곳은 민족적 차원에서의 의미가 깊었다. 단성사에서는 1919년 국내 한국인에 의해 국내 자본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1919)를 상영했고 1924년에는 박승필이 단성사 촬영부를 둬 순전히 한국인의 힘으로 〈장화홍련전〉(1924)을 제작했다. 김승구 교수(세종대 국어국문학과)는 “단성사는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 제작과 배급에도 참여했다”며 “〈아리랑〉(1926)과 같은 영화를 개봉함으로써 민족의 울분을 터뜨리는 역할도 했다”고 말했다. 〈아리랑〉은 3·1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버린 주인공 ‘김영진’의 삶을 그려 나라를 빼앗긴 민중의 설움을 대변했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단성사의 대다수 상영작은 할리우드 영화가 차지했다. 국내의 영화 제작 기술과 연출 능력 등이 할리우드 영화에 비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는 어느 때에든지 수입된 영화의 구 할 이상이 항상 되었다.”(「영화계의 1년」, 『조선일보』, 1926년 1월 1일 자) 

경성의 영화관은 흥행할만한 할리우드 영화를 배급하기 위해 영화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왕중왕〉은 조선극장에서 지난 6일부터 일제 측 중앙관과 한가지로 상영하려 하다가 문제가 생겨 못하게 되고, 7일부터는 신문 광고에 조선극장과 단성사가 똑같이 ‘왕중왕은 기어코 우리 집에서 상영하게 됐습니다’하는 예고를 하고 있다.”(「날개를 찢긴 천사와 쟁투 와중의 왕중왕, 조선극장과 단성사 사이에 끼어서 궁금하다, 왕중왕은 어디로 가나, 영화흥행계 경쟁과 암초」, 『중외일보』, 1929년 6월 9일 자) 이는 경성 시민 사이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인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할리우드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을 동경하던 모던걸, 모던보이는 그들을 따라 하며 하나의 유행을 형성했다. “‘하롤드, 로이드’의 대모테 안경*이 조선의 젊은 사람의 유행이 되었고, (중략), 미국 서부활극에 나오는 ‘카우보이’의 가죽바지가 조선 청년에게 나팔바지를 입혀줬다.”(만문 만화 「모던보이의 산보」, 『조선일보』, 1928년 2월 7일 자) 하지만 당시 경성에서 할리우드 영화배우를 따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승구 교수는 “영화 주인공이 사용한 물건을 쉽게 구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헤어스타일을 따라 하는 정도에 그쳤다”고 말했다.

영화의 대부분이 무성영화였던 당시, 변사의 역량은 영화 관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인공의 대사와 이야기의 흐름을 변사가 서술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 제국주의에 편입된 당시 조선은 일본을 거쳐 할리우드 영화를 수입했기 때문에 일본어 자막을 해석해줄 변사가 필수적이었다. 김 교수는 “당시 사람들은 영화의 주연 배우와 감독보다 변사에 따라 영화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관객은 변사와 함께 울고 웃는 등 변사와 소통하며 영화를 관람했다”며 “현재 영화관의 정숙한 분위기와는 달리 굉장히 시끌벅적했다”고 말했다. 

소란스러운 영화관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규모와 운영 방식에 있어 단성사는 현대의 영화관과 차이가 있다. 현재 대부분의 영화관이 여러 개의 상영관으로 구성되고 한 상영관의 좌석이 300석을 넘지 않는 것에 반해 단성사는 680석 규모의 단관이었다. 김 교수는 “한 번에 관람하는 관객 수가 많다 보니 더욱 분주한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영화관에 한 번 돈을 내고 입장하면 영화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각종 연희나 영화, 대중 가수의 콘서트 등을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이처럼 100여 년 전 경성의 영화관은 현재와 다른 분위기와 운영 방식을 지녔다. 하지만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설렘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영화 포스터가 부착된 강남 메가박스 씨티점과 경성 영화관 단성사의 외관을 합성한 사진이다. 기사 본문에는 1920~30년대 단성사의 모습을 다루지만 사진은 단성사의 1960년대 사진이다.사진 제공: 연합뉴스
영화 포스터가 부착된 강남 메가박스 씨티점과 경성 영화관 단성사의 외관을 합성한 사진이다. 기사 본문에는 1920~30년대 단성사의 모습을 다루지만 사진은 단성사의 1960년대 사진이다.사진 제공: 연합뉴스

 

1920~30년대 근대 문물이 쏟아져 들어와 경성의 여가문화를 꽃피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문화를 마냥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으로만 볼 수 없다. 당시 조선이 일제의 통치 하에 억압된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경성의 찬란한 여가문화는 모두의 것이 아니었다. 이기훈 교수(연세대 사학과)는 “일당을 받는 경성의 노동자에게는 휴일의 개념이 없었다”며 “학생들과 월급을 받는 은행원이나 회사원, 그리고 돈이 많은 일부 계층만이 여가문화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더불어 여성은 종종 소비의 주체보다는 소비의 대상이 되곤 했다. 다방에서 술을 따랐던 여급과 백화점의 볼거리였던 쇼프걸은 경성부민에 의해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상품’으로 소비됐다. 이렇듯 세련된 식민지 경성의 모습 그 이면에는 문화를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일부 부민의 설움도 서려 있었다.

 

*기사에 실린 신문, 잡지의 기사는 김승구 교수, 최병택 교수, 김정은 씨의 책과 논문을 재인용하는 과정에서 국사편찬위원회 누리집을 통해 원문을 모두 재확인한 것입니다.

*대모테 안경: 거북의 일종인 대모(玳瑁)의 견고한 등판으로 가공한 안경테. 당시 이 재질로 가공한 공예품을 ‘별갑'이라 부르며 안경테로 사용하는 게 유행이었다.

*구인회: 순수문학을 표방한 문단의 중견급 작가 9명이 결성한 문학동인회.

*전문학교: 근대 이후 신교육의 도입에 따라 발달된 대학 수준의 고등교육기관.

 

사진: 유수진 기자 berry832@snu.ac.kr

삽화: 홍해인 기자 hsea97@snu.ac.kr

레이아웃: 황지연 기자 ellie0519@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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