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 만난 사람들 | 동반성장연구소 정운찬 이사장

‘정운찬’은 한 마디로 딱 정의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상아탑을 떠난 뒤 행보를 보면 특히 더 그렇다. 13년 전, 정운찬 교수는 서울대 총장으로서 임기를 마치고 학교 밖으로 자신만의 발걸음을 옮겨갔다. 한때는 차기 유력 대선 주자로서 정계의 주목을 받았고, 이명박 정부의 요청을 받아 총리직을 수행했다. 2018년부터는 KBO 총재로 취임해 야구인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거시경제학자로서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난 8일(수) KBO 총재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물어야만 했다. 그는 “나를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지금은 KBO 커미셔너와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고 이 두 가지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개인적으로는 동반성장 전도사를 자임한다는 정운찬 교수. 찬탄과 비난을 겪으며 자신만의 길을 구축해 가고 있는 그의 여로를 『대학신문』에서 따라가 봤다.

사진 제공: KBO 홍보팀
사진 제공: KBO 홍보팀

≫31년 동안 서울대에 몸담았었다. 주당(酒黨)으로 유명했다는데 사실인가?

주당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다. 실제 내 주량은 소주 한 병 정도고 평소에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는다. 특히 집에서는 하나도 안 마신다. 총장으로서 외부인을 만나야 할 일이 많았는데 그때, 그 사람들에 맞춰서 술을 마시다 보니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사실 술을 마시게 된 데도 사연이 있다. 1980년 5월 17일에 나는 관악사 사감을 맡고 있었다. 당시 사감장이 한밤중에 사감들을 사감실로 불러서 갔더니 군인 천여 명이 저벅저벅 학교로 들어와 사생들을 거의 실신할 정도로 때리는 것 아닌가. 사감실까지 학생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얼마 뒤 군인들이 사감실로 들어왔고 교수들도 봉변을 당했다. 어떤 교수는 팔꿈치와 정강이에서 피멍이 들 정도로 맞았다. 그렇게 17시간 동안 감금당했는데 이런 정치 상황에 대해 속상함을 느꼈고 지식인이라는 교수들이 그 같은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 부끄러워서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총장 재임 시절에 대해 더 이야기해 달라. 특히 총장으로서 서울대 정원을 감축하고 지역균형선발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내부적으로 많은 비판이 있었는데 어떤 목적과 생각에서 이 같은 정책을 추진했는가?

지금까지도 “정운찬이 정원 줄여서 등록금 수입 줄었다”고 비판하는 사람 있다. 그때 서울대 학생 100명 중 42명이 서울 출신이었고, 26명이 강남 출신이었다. 학생처 직원과 “앞으로 서울대가 국립대가 아니라 서울시립대, 강남구립대가 되겠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한 적도 있다. 구성원이 획일화되면 다른 생각이 싹틀 수 없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매일매일 부딪칠 때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이 태어날 수 있다. 그래서 지역 균형선발제를 도입한 것이다.

정원 감축도 질적 교육 확대의 목적도 있었지만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동일한 맥락에서 추진한 것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다양한 배경을 지녀야 한다. 그런데 주요 정부 부처를 가보면 약 3분의 1이 서울대 경제·경영 출신이다. 이게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국가 조직을 이끌 인재들 대부분이 서울대에 입학해, ‘조순’적 사고, ‘변형윤’적 사고만을 배운다면 사회를 변화시킬 독창적인 생각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올해 초 오세정 총장이 새로운 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때의 경험을 살려서 조언해줄 수 있겠는가?

오세정 총장은 대한민국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사람 아닌가. 학문에 대한 생각도 확고하고 연구, 교육도 잘 지원할 것이다. 다만 오세정 교수에게 학원 자율화를 1번으로 생각하길 바란다고 당부하고 싶다. 내가 총장이던 시절에는 정부에서 서울대를 없애려 했고 각종 압력도 많았다. 나름대로 잘 대처했다고 자부하지만 말이다. 파리 1대학, 2대학처럼 전국의 대학을 개편하거나 서울대는 대학원만 남기고 학부 과정을 폐지하는 등 개편안도 나왔었다.

자율이 없으면 대학이 발전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고안해내더라도 내실 있게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학생을 어떻게 뽑아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대학 외부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대학 발전에 도움 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옳은 일도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학원 자율화가 1번이다.

 

≫오세정 총장의 경우 국회의원 신분에서 총장 후보로 나선 것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총장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세정 교수가 총장으로 당선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데 이것 하나는 짚고 가겠다. 오세정 의원이 출마 발표한 날인가 그 다음날에 어느 일간지에서 “국회의원 하다가 관두고 자신을 낮춰서 대학 총장하려하나? 이해가 안 된다”라는 논조의 기사를 실었다. 나도 총장을 지낸 후 총리를 했지만 총리는 조선시대로 치면 영의정, 서울대 총장은 대제학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영의정과 대제학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제학을 고를 것이다. 서울대 교육 전반을 책임지는 총장이라는 자리는 국회의원보다 훨씬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이야기고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아마 정치하던 사람이 총장하면 되냐, 이런 것일 것이다. 이제는 세상이 실용적으로 변했다. 어느 자리에 있느냐보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핵심은 오세정 교수가 다른 후보들에 비해 학교를 더 잘 만들 수 있는지 따지는 것 아니었겠는가. 그리고 오 총장은 이미 구성원 투표를 통해 당선되지 않았나. 이제는 학교 좀 잘 만들어 주십쇼하며 지원해줘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정치인으로서 정운찬에 대해 가장 논란이 많고 여러 가설이 난립하는 주제가 바로 이명박 정부에서의 국무총리 활동이다. 17대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대항마로 떠올랐으나 불출마를 선언하고 2년 후에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직접 그 전말을 듣고 싶다.

우선 나는 내가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인이라면 정당에 가입하고 선출직에 출마해야 하는데 나는 서울대 총장직에만 출마해봤다. 정치인으로 불리는 것 자체도 좋아하지 않는다.

2007년 봄에 정말 여러 군데서 출마하라고 권유를 받았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달라는 요구였다. 준비가 안 됐다고 말했으나 그래도 한번 해보라고 해서 2월부터 2~3개월간 전국에 강의 투어를 했다. 투어를 하면서 내가 정말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포기한 것이다.

2009년 여름에는 북한 핵실험으로 남북관계가 급격히 경직돼 있었고 저성장에 분배도 악화돼 나라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 정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대통령이 광우병 파동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후 탕평책으로 평소에 비판적인 사람을 물색하다 나를 찾았나 보다. 그래도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중시하는 경제학자로서, 중립적인 실용주의자로서 이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수락한 것이다.

 

≫이후 1년 만에 총리직을 사임한 것은 왜인가?

세종시 문제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한 세종시 수도 이전에 대해 행정부 완전 이전이 위헌 판결이 나면서 행정부의 일부만 옮겨갈 예정이었다. 그 결과 중요결정을 내리는 고위 관료는 서울에 있고 실무진만 세종에 파견돼 의사결정을 한 시간, 한 장소에서 차분하게 논의할 기회가 없어지는 문제가 예상됐다. 실제로도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나타났다. 그래서 행정부의 일부가 옮겨 간다는 기존 법안에 대해 반대하는 수정법안을 냈다. 

그러나 2010년 6월 29일에 박근혜 의원을 필두로 한 친박 계열, 일부 친이 계열 의원들이 반대해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책임을 지고 당일 외국에 있던 대통령이 귀국하자마자 7월 4일에 사표를 내고 8월 11일에 그만뒀다. 약 1년을 한 것인데 후회하지는 않는다. 사회과학자로서 정부에 가서 많은 것을 배웠다. 또한 임기 중 실제로 마이너스(-) 성장을 플러스(+)로 전환했고, 친기업적인 이명박 정부에서 추가적인 부자 감세를 막는 등 분배 문제가 악화되는 것도 막았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19대 대선에 다시 출마를 선언했고 이후 다시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런 결정을 내린 까닭이 있는가?

동반성장 사회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다. 2017년에 촛불집회를 겪으며 이를 더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친구들도 목표를 이루려면 세종로 1번지나 여의도를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정치를 통해 동반 성장 사회를 건설하려는 마음을 먹었었다. 2017년 1월 1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대선 출마 선언을 하고 캠페인 활동을 했다. 그런데 하다 보니 다시 2007년 생각이 났다. ‘준비 없이 달려들었구나’ ‘동반성장 하나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몇 달 동안 캠페인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동반성장을 많이 알렸다고 생각한다. 

 

≫지속적으로 동반성장을 강조해왔는데 이 아이디어에 관해 설명해 달라.

2010년 봄에 총리실로 중견기업 대표가 찾아온 적이 있다. 이민을 갈 생각이라고 했다. 한국에선 납품 단가 후려치기가 너무 심해서 버틸 수 없다는 것이다. 중견기업인이 이러는데 중소기업은 어떻겠는가? 대통령에게 특단의 조치를 건의했다. 그렇지 않으면 파탄 날 거라고 얘기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해 12월 동반성장위원회를 발족했다. 개인적으로는 동반성장위원회가 상당한 실적을 거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이 부족해서 결국 2012년 봄에 그만두고 위원회와는 별개의 동반성장연구소를 만들어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동반성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그리고 지역과 세대 및 국가들도 같이 성장할 수 있도록 사회 작동원리를 개편하자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수출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원가절감 수단으로만 사용한다. 서면 대신 구두주문, 기술탈취, 장기 어음결제와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불공정거래를 통해 중소기업을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수출가를 낮춰서 수출이 잘 됐다면 보상적 차원에서 불공정거래를 당한 중소기업에게 이윤을 나눠주자는 것이다. 

이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나를 ‘빨갱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별난 아이디어가 아니다. 1920년대부터 할리우드에서는 영화 제작 시 일차적으로 감독과 배우에게 개런티를 주고 영화가 잘 되면 이익을 공유해왔다. 그 뒤 롤스로이스, 크라이슬러, 캐리어 등도 이 제도를 채택했다. 또한 지난 미국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 힐러리 클린턴 모두 대통령이 된다면 모든 수단을 강구해 이익 공유(profit sharing)가 전 산업에 걸쳐서 확산되도록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더욱이 지금 세계의 기업생태계는 대기업 대 다른 대기업 경쟁이 아니고 대기업+협력기업 대 다른 대기업+협력기업의 형태로 나타난다. 대기업은 협력중소기업과 같은 배에 탔다. 꼭 불공정 경쟁에 대한 보상이 아니더라도 같은 배에 탔으면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이밖에도 레미콘, LED 조명등, 된장, 간장 고추장 등은 중소기업 몫으로 보호하고, 더 나아가 정부에서 중소기업 제품 지출을 늘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 저성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구조상 중소기업이 99%가 넘고 고용의 88% 정도를 책임지고 있기에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분배 문제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행보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앞으로 어떤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가? 더 직접적으로 말해 대통령 후보 정운찬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정치는 이제 할 생각이 없다. 전에도 말했듯이 준비도 안 돼 있다. 앞으로는 사회 운동가로 살아갈 생각이다. 지금도 동반성장 전도사로 자임하고 다니고 있다. 그리고 34년간 교수로 있으면서 책도 많이 썼지만 이건 하나 남기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책이 있다. 한국 경제론을 제대로 한번 써보고 싶고 『야구예찬』도 2탄을 다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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