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 임현 소설가 신작 연재 소설 ④

*편집자 주

이번 학기 『대학신문』에서는 임현 소설가의 신작 소설을 다섯 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다음 내용은 1988호(5월 13일 자)에서 이어집니다.

6. 좀 전까지 어지러웠던 식탁 위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이 말끔했다. 더 닦거나 헹궈야 할 것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식탁을 떠나지 않는 수경이 나는 신경이 쓰였다. 고작 빈 컵만을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무언가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일까. 어쩌면 수경은 지금 그걸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 

“뭐,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수경을 마주 보고 앉으며 내가 물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들은 나를 탓하거나 원망하는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내심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변명하거나 미안해하거나 거기에 어울리는 표정 같은 것들을 미리부터 준비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예전에 잠깐 연극을 한 적이 있었거든.”

“그런 것도 한 거야?”

“응, 대학 다닐 때. 진짜 잠깐. 그런데 결국엔 공연을 올리지는 못 했어. 배우였던 후배가 갑자기 연락도 없이 나오지 않았거든.”

“사람 참 무책임하네.”

나는 내 몫의 물을 따른 다음 수경의 컵에 모자란 물을 채워 주며 말했다. 

“그렇지, 무책임했지. 그런데 이상한 건 돌아온 다음부터였거든. 사과하거나 핑계를 대거나 하다못해 사람들을 피해 다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딘가 당당한 거야. 보름도 넘게 연락도 없이 남해안으로 무작정 여행 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거지.” 

물 컵 주변으로 생긴 마른 물 자국을 손으로 문지르며, 나는 수경의 말을 들었다. 계획 없이 여기저기를 이동했다는 수경의 후배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가는 길에 조치원이나 논산, 나주나 군산 같은 데를 들러 방송에 나온 식당에서 게장이나 곰탕 같은 걸 먹고 하루를 묵은 뒤 다시 이동했다는 이야기. 모주는 달고 금방 취해서 계획에도 없이 전주에 머무른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 여행이었다. 광주나 담양이라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니까 해안가 근처에서 멀리 하얗게 빨래가 널려진 풍경과 그러나 정작 가까이에서 본 것은 예상과 달리 마른 생선들 뿐이라는 이야기들. 특별히 무얼 보려고 떠난 것도 아니었고, 무얼 바란 것도 아니었으므로 이후로는 거제로 부산으로 창원이나 속초 같은 데를 따라 동해안으로 계속 여행을 했더라도 별다를 게 없을 것 같은 여행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경은 그곳을 여행한 것이 마치 자기 자신이었던 것처럼 내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애가 그래. 거기서 나를 봤다는 거야.”

낡은 소읍이라고 했다. 그런 곳과 어울리게 오래된 사찰로 유명했는데 거기 일주문까지 올랐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더 가지 못하고 기와 아래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런데도 그 큰 비를 다 맞으면서 누가 산 아래로 마구 달려가더래. 그러고는 그래. 그 사람이 진짜 나를 닮았다고.”

우중의 날씨 탓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환경에서 진짜 아는 사람을 본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테니까. 실은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닮은 거라고 오해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라고. 수경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했었을 것이다.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무엇으로 증명하기에도 번거로운 일에 속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연극을 올리지 못하게 된 데에 대한 책임을 묻는 말들, 누군가 피해를 받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묻는 말들, 설교하고 책망하는 말들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뒤로도 그 애는 자꾸 그때 내가 거길 갔었느냐고 묻는 거지. 그때마다 나는 궁금했거든. 이 아이는 어째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걸까. 왜 가지도 않은 남해안 이야기를 하는 걸까. 실은 나도 그 애를 본 적이 있거든. 시내 서점에 앉아서 골똘히 무얼 읽는지 내가 코앞에 있는 것도 모르더라. 그래서 그 애를 붙잡고 연락도 받지 않고 여기에 있으면 어떡하냐고 내가 막 화를 냈거든. 단단히 야단을 칠 생각이었어. 그런데도 정말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만 보는 거야. 그러고는 나를 보면서 누구냐고 묻는 거야.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마치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것처럼.”

수경에 따르면 단순히 책임을 모면하거나 회피하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겠냐는 것이었다. 무엇하러 금세 들킬만한 거짓말을 하고, 그보다 더 큰 거짓말을 해서 스스로를 곤란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도 했다. 무엇 보다 그렇게 금방 돌아올 거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나중에는 그 애의 말이 진짜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더라. 어쩌면 우리 중 누군가는 그때 진짜 여기보다 먼 곳에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도 서로를 다른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거 아닐까. 아니면 내가 본 것도 실은 다 거짓말이 아닐까. 그애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쩌면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아. 그럼 그건 누구였을까. 단순히 내가 어느 순간 내가 믿고 싶은대로 그렇게 믿어버린 건 아닐까.”

그리고 나는 수경의 말에 나름대로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혹시, 수경이 말하는 그 후배가 실은 나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아무런 근거 없는데도 아마 그게 유희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라면 수경에게 묻지 않았다. 무엇보다 묻더라도 거기에 대해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있잖아, 실은 아까 당신이 쓴 거 읽었어. 유희가 보여주더라.”

나는 수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수경이 조금 웃었다. 웃었으나 그게 진짜 웃는 건지 모를 만큼 아주 가볍게 웃었다. 어쩌면 그게 나를 배려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아주 미안해지지 않게. 그럼에도 상대방에게 적당한 부담감과 미안함을 갖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그것으로 내가 본래 수경에게 해야 할 말들, 둘러대고 변명하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혹시 기분이 상했던 건 아니냐, 그랬다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하는 식의 말들조차 모두 생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내가 그렇게 오해한 것일 뿐, 수경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걸 읽는데 또 그때 생각이 드는 거야.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당신은 그런 걸 쓰는구나 싶더라. 그런데 나는 안 그렇거든.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식탁을 위로 수경의 손이 나를 향해 건너왔다. 무방비하게 놓여 있던 내 손 위로 수경의 손이 덮어졌다. 그게 어떤 의도인지 알 수 없었으나 조금 당혹스러웠다. 

“어서 자. 내일 일찍 떠나야 하잖아.”

화제를 돌리고 나는 수경의 잠자리를 살피겠다는 핑계를 대며 그대로 일어섰다. 작은 방에는 이미 이불 한 채가 깔려 있었다. 한쪽에 수경의 간소한 짐들이 놓여 있었다. 별달리 준비할 것도 없는 방 안을 나는 괜히 둘러보고, 이불을 반듯하게 펼쳐댔다. 그러는 사이 곧이어 수경이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수경은 내게 말했다.

“실은 나는 내일 거기 가지 않을 거야.”

“안 갈 거라니? 일본에 갈 거 아니었어.”

“응, 가지 않아.”

나는 수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피곤할 테니, 우선 잠을 좀 자두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나는 대답했다. 

거실에는 이제 아무도 없이 고요한 식탁과 빈 물 잔 둘 뿐이었다. 나는 개수대에 그것을 내려놓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든 유희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수경이 말한 의도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혹시 내가 쓴 글들이 일본에 가지 않는 어떤 이유가 되었다는 말일까. 유희는 무슨 의도로 수경에게 그런 글을 보여줬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유희 쪽으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이 잠들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누운 그대로 유희는 나를 또렷이 바라보며 무언가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뭐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소리를 담아 유희가 다시 말했다.

“개자식.” ▇

삽화: 송채은 기자 panma200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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