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에서도 반도체 계약학과(반도체학과) 신설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미래 산업으로서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육성하기 위해 학부 단위의 인재 양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한 지원을 제안했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연세대와 고려대는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의 지원을 받아 계약학과에 대한 계획을 내놓았다. 이 학과의 재학생은 계약 기업에 채용이 보장될 것이며, 계약 주체로서의 기업은 학과 운영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게 된다. 서울대 또한 이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면 본교에는 전례 없는 학부과정 계약학과가 신설되는 것이다. 

서울대가 학부 계약학과 신설이라는 실험을 하면서까지 반도체학과를 만들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국가적으로 미래 산업을 견인할 수 있는 ‘비메모리 반도체’를 육성하고, 이를 위한 기술력 및 인적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기여하는 방법은 다른 대학들이 택하고 있는 것과 다를 수 있다. 이미 몇몇 대학에서 학부 계약학과를 통해 인적자원을 배출한다고 한 상황에서 이들 대학과 동일한 자원을 두고 경쟁할 필요가 있는가? 오히려 대학원 수준의 연구자원을 확보하거나 전 세계적인 특허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연구환경 및 연구지원을 고려하는 것이 더 파급력있는 기여가 될 수 있다. 정말 기업이 참여하는 계약학과 신설이 필요하다면 대학원에 계약학과 및 연구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게다가 산업계의 요구에 부응하는 기업과의 계약학과 신설은 서울대 학부교육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대학 교육을 통해 육성된 인재는 폭넓은 교양과 전문기술을 동시에 갖출 것을 요구받는다. 서울대는 창설이래 세계로 뻗어나가는 창의적 인재상을 추구해왔고 학부 교육을 통해 전문적 기술인이기에 앞서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과 더불어 살아갈 힘을 키워나가는 것도 교육의 목표로 설정해왔다. 그런데 계약학과로 운영될 ‘반도체학과’는 취업에 특화된 학과로 학생들의 배움은 고스란히 기업에서 요구하는 직업기술로 초점이 맞춰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학부 교육과정의 다양한 측면에 기업의 산업적 요구가 개입하면서 서울대 학부 교육의 교양과 전문기술을 아우르는 조화와 균형이 깨지게 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학부 졸업생 수준의 전문 직업인을 양성하려는 취지에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의 다양한 배움 기회가 보장될 수 있도록 서울대는 기업과 정부 등과 적극 협상에 나서야 할 것이다.

대학은 자유교양인을 길러야하는가? 아니면 전문 직업인을 길러야 하는가? 대학교육의 목적을 둘러싼 두 갈래 길에서 한국의 대학은, 특히 서울대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 이미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대학의 교양교육이 죽었다는 한탄을 듣고 있지만, 여전히 대학교육의 목적이 무엇이고, 왜 그래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유효하다. 계약학과 신설로 인해 투입될 재원이 대학 운영에 일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서울대는 단기적인 산업계 요구에 부합하려하기보다는 대학교육에서 부단히 지켜나가야할 인재양성의 철학과 원칙을 세우고, 이를 어떻게 지켜갈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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