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도심에 부대껴 살던 어느 날, 회사에서 한 시간이면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거리에 깨끗하고 쾌적한 집이 제공된다고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은 새로운 곳에서 깨끗하고 쾌적한 삶을 살아가는 장밋빛 미래를 그릴 것이다. 1989년 1기 신도시 계획이 발표됐을 때 시민들의 기대 역시 이와 같았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이 신도시에는 여느 서울의 주거 구역과 다르지 않게 고밀도 주거 단지만이 형성돼 있다. 신도시 건설 당시 도시의 자족성과 개별적 특성이 고려되지 않아 주민의 다양한 문화적 요구가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 바야흐로 세 번째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지금, 『대학신문』에서는 대한민국 수도권 신도시 개발의 역사를 간략히 짚고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살펴보려 한다. 나아가 해외의 다양한 신도시 사례들을 살펴본 후,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신도시 정책의 방향성과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1989부터 2019까지 대한민국 신도시 개발 30년사

◇1기 신도시의 원대한 꿈=대한민국 신도시 개발의 역사는 19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구집중, 투기, 올림픽 특수 등의 복합적 요인으로 집값이 상승해 수도권의 주택문제가 발생하자, 1988년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주택 200만 호 건설 공약을 내세웠고, 같은 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듬해인 1989년,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 다섯 곳이 1기 수도권 신도시로 지정돼 건설됐다.

박인권 교수(환경대학원)는 “우리나라 초기 신도시들의 가장 큰 특징은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이 고밀도로 집적돼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과 인근지역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주택수요를 빠르게 만족시킬 수 있는 대규모 주택단지의 공급을 위해 신도시가 조성됐다”며 “정부는 3년 동안 30만 호의 주택을 건설해 120만 명을 이주시켰다”는 점을 들어 우리나라 신도시 개발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국 신도시 개발의 시초인 1기 신도시는 고밀도의 아파트 단지가 늘어선 이미지로 대표되며, 현재 중심 도시인 서울로 통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2기 신도시, 고치지 못한 외양간=1기 신도시가 건설된 지 약 20년 정도가 지나 1기 신도시에 많은 시민들이 정착할 무렵, 중산층 이상 서울 거주자에게 쾌적한 주거환경을 제공하고 친환경적인 ‘문화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2000년대 후반 2기 신도시 사업이 진행됐다. 판교, 위례, 검단, 동탄 등을 포함하는 2기 신도시들은 판교를 제외하면 1기 신도시들에 비해 비교적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입지했다. 또한 친환경·쾌적성·문화를 주요 키워드로 강조하는 등 과거에 비해 주거환경의 질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시대적 추세가 도시 계획에 반영됐다. 하지만 2기 신도시는 자신만의 도시 정체성이 부족해 1기 신도시와 유사하게 베드타운으로 전락했다. 쾌적한 주거 환경 조성이라는 목표 역시 이전에 비해서는 나은 성과를 거뒀지만, 주택에 대한 높은 수요 압력으로 인해 본래 계획했던 수준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3기 신도시, 이번에는 다를까?=1기 신도시와 2기 신도시가 건설된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수도권으로 유입되고 주택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자, 수도권의 집값은 걷잡을 수 없이 폭등했다. 이에 2018년 문재인 정부는 집값 안정을 목적으로 하는 9·21 주택공급대책에서 3기 신도시 계획을 언급했다. 같은 해 12월 20만 가구를 예정 물량으로 인천 계양지구, 남양주 왕숙지구, 하남 교산지구, 과천 과천지구가 신도시 부지로 선정됐고, 지난 9일(목)에는 부천 대장지구와 고양 창릉지구 두 곳이 추가로 선정됐다. 3기 신도시 계획에는 1기, 2기 신도시와 달리 지역 내 유치원을 100% 국공립으로 운영하겠다는 계획이 포함돼 있으며, 3기 신도시 여섯 곳 모두 상대적으로 서울로의 접근성이 매우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분당에 20년간 거주해 온 공인중개사 박모 씨(51)는 “3기 신도시가 서울에 매우 근접하게 입지한 것은 수도권 집값을 잡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메시지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기업지원허브와 판교테크노밸리와 같은 첨단산업공단을 유치해 자족성을 확보하고 최첨단 IT도시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3기 신도시의 목표인데 이 계획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며 앞으로의 진행상황을 신중히 살펴봐야 할 것이라 부연했다.

 

 

지금까지 이런 신도시밖에 없었다. 이것은 신도시인가, 양계장인가? 

1기 신도시가 건설된 이후,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표현이 부동산업계에 등장할 정도로 수도권 신도시에 거주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택 부족이라는 양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질적 차원에서 여러 문제를 낳기도 했다.

현재 신도시 문제로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은 신도시가 고밀도의 주거단지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신도시 건설의 목적은 주택의 대량 공급을 통해 주거의 쾌적성을 보장하는 것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서울 도심 인구 과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성한 신도시에는 서울 못지 않게 과밀한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권용우 교수(성신여대 지리학과)의 2006년 연구자료에 따르면 1기 신도시 다섯 곳의 평균 순인구밀도는 헥타르 당 773.2명으로, 기존 서울 시가지(목동, 상계)의 순인구밀도인 헥타르 당 724.5명에 비해 오히려 높은 수치를 보였다. 결국 1기 수도권 신도시들은 기존 서울의 신시가지 아파트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거주환경의 쾌적도 측면에서 거의 나아지지 않은 것이다. 1기 신도시인 평촌에 11년 동안 거주해 온 40대 이 모 씨는 “평촌이 계획도시여서 공원 같은 시설의 쾌적성에 대해 신경 써 주기는 하지만, 여전히 아파트가 과다하게 밀집돼 있어 아파트의 숲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2기 신도시는 목표 인구밀도를 헥타르 당 100명 내외 수준으로 잡아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 통계수치가 제대로 집계되지 않아 문제가 해결됐는지는 알기 어렵다. 

신도시가 자족성 부족으로 인해 침상도시 전락하는 문제도 지적된다. 1기 신도시의 경우 수도권의 중심업무인 상업기능 이전을 통한 신도시의 자족성 확보를 계획 단계부터 고려했음에도 기능 이전이 기대한 만큼 일어나지 않았다. 박인권 교수는 “과거에 비해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신도시는 직업과 주거의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서울에 종속돼 있다”며 “이로 인해 신도시 주민들은 중심도시로 장시간 출퇴근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신도시의 자족성 부족이 ‘통근전쟁’으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이란 것이다. 이와 같은 신도시 자족성 부족의 주요 원인으로는 자족기능 확보를 위한 상업·업무 용지*가 전체 부지 면적의 1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과소책정된 것이 꼽힌다. 손정렬 교수(지리학과)는 “해외의 신도시들은 자족성 확보를 위해 대체로 20% 내외의 상업·업무 용지를 책정하는 편인데, 한국의 신도시들은 상업·업무 용지에 비해 상업 용지*가 과도하게 넓게 책정돼 있다”며 “신도시 상가의 미분양 현상으로 인한 높은 공실률은 또 다른 문제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도권 신도시의 정체성 부족 역시 문제다. 정부 주도하에 설계된 한국의 신도시들은 기초 편의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대체로 매우 높은 편이지만,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거나 도시 및 지역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계획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손정렬 교수는 “도시 정체성이 부족해 도시 자체가 거대한 주거단지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며 신도시의 정체성 부족 문제를 비판했다. 지역 정체성 및 도시 이미지 결여에서 파생되는 문화 컨텐츠 부족 역시 신도시의 한계로 지적된다. 신도시들이 주거와 관련된 기본적인 욕구는 충족시키지만, 문화 및 예술 활동과 같은 거주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서울의 꼭두각시? 수도권 신도시의 힘겨운 홀로 서기

신도시가 중심도시에 종속된 획일적 베드타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독립적 도시로의 명확한 이미지를 구축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상업·업무 용지 면적을 상향 책정해, 도시의 인구가 도시 내에서 근로와 생활을 모두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손정렬 교수는 “상업·업무 용지의 면적을 영국의 도클랜드, 도쿄의 동경만 매립계획과 같이 20% 내외로 상향 책정해 도시 자족성 확보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도시 브랜딩을 추구할 수도 있다. 판교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윤 모 씨(43)는 자족성 확보와 도시 브랜딩을 동시에 이룬 모범 사례로 판교신도시를 언급하며 “판교신도시가 판교테크노밸리를 통해 많은 벤처 기업들을 유치한 것처럼, 3기 신도시는 최첨단 IT도시의 입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쾌적한 신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업 유치를 넘어, 주민들의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하고 다양한 어메니티를 갖출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런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도시의 개념적 기원인 에버니저 하워드의 ‘전원도시론’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저서 『내일: 진정한 개혁에 이르는 평화로운 길』에서 하워드는 대도시 외곽에 쾌적한 주거환경과 함께 상업·공업 기능을 모두 가져 자족할 수 있는 도시를 제시했다. 당시의 전원도시론은 노동자의 보건, 건강문제 해결과 도시 경관 개선까지 고려한 혁신적 시도였는데, 그의 이론이 반영된 레치워스, 할로 등의 런던 근교 전원도시는 성공적인 전원도시의 사례로 꼽힌다.

우리나라의 신도시에서 이런 영국의 모델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주택 밀도를 꾸준히 줄여나가는 한편, 계획 단계에서 신도시 내부의 녹지·공원 면적을 의무적으로 일정 비율 이상 할당해 삭막한 도시의 획일적 모습에서 탈피할 수 있다. 박인권 교수는 “해외 신도시들은 대체로 중심도시의 혼잡을 피해 전원적 삶과 도시적 삶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개발됐다”며 “우리나라 신도시들 역시 전원적 삶을 일정 정도 향유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고밀도 주거공간에서 쾌적한 문화 신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도시 계획 단계에서 ‘채움’에서 ‘비움’으로 공간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공간이 여러 건물로 꽉 차 있을 때, 새로운 건물을 계속 지어 넣는 것은 쾌적하지 않은 고밀도의 주거환경을 만들 뿐만 아니라 도시의 삭막함만 가중시킨다. 손정렬 교수는 “도시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100% 활용되는 꽉 찬 공간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며 “빈 공간이 도시 공간에서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백의 공간이 거주민들 입장에서 휴식처가 될 수 있고, 숨을 돌릴 수 있는 생태적 기능을 하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도시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의 집결지?

일반적으로 분당이나 판교, 일산과 같은 대표적인 신도시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를 생각해볼 때, 사람들은 대체로 그저 중산층의 주거지역만 떠올릴 뿐, 도시의 상징이나 정체성을 떠올리지 못한다. 이는 그 도시에 살아가는 주민들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손정렬 교수는 “지역 정체성은 자랑할 만한 지역의 요소, 즉 역사와 전통에서 유래하는데, 근대 신도시는 역사성이 없다”며 “주민들이 거주공간에 의미를 부여해 ‘우리는 하나다’라는 애착과 소속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공적인 신도시 조성을 위해서는 주택공동체와 지역공동체를 추구해 지역정체성을 확보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신도시를 문화 도시로서의 이미지로 안착시키는데 성공한 대표적 예는 프랑스 파리 근교 라데팡스를 들 수 있다. 도시 디자인 및 브랜딩 차원에서 국가의 고유한 특색이 반영된 라데팡스는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신(新)개선문,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이 많이 존재하며, 자동차는 지하로만 다녀 보행하기 편리하다. 프랑스의 예술적 감각이 도시에 잘 녹아든 것이다. 이처럼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문화도시는 굳이 좁은 의미의 문화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생활을 하나하나 문화적 요소로 이해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인 ‘캠퍼스 문화’ ‘직장인 문화’ ‘유흥 문화’ 등이 이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손정렬 교수는 “‘문화 도시’란 의도적으로 문화를 접하고자 해야만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그 자체가 문화가 되는 것”이라며 “공공문화공간의 개방성, 접근성, 공공성의 증대를 통해 주민 모두가 문화의 ‘소비’와 ‘생산’을 겸하는 프로슈머가 되도록 사고를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상적 문화공간의 조성을 통해 다양한 자생적 문화가 만들어지고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현대도시 및 신도시의 지역정체성 부활 방안으로 TND(Traditional Neighborhood Development)와 TOD(Transit Oriented Development)가 등장했다. TND는 옛날의 ‘마을공동체’로 돌아가자는 의미고, TOD는 특정 지역의 기차역, 전철역, 버스정류장 중심으로 주변을 둘러싸며 도시를 개발하는 것이다. 역 주변에 상업시설과 공공시설이 집중되면 자연스레 주민 간 교류가 일어나게 되고, 이런 곳이 공공광장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한국의 신도시에도 미국의 사례와 같이 공공광장을 주택단지 설계에 반영해 연못, 놀이터, 팔각정 등 모이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개발할 수 있다. 손정렬 교수는 도시 공간의 구성을 두고 “마을은 평면적으로 펼쳐져 있어 마을 구성원이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서로의 유대감이 형성될 수 있는 반면, 아파트는 수직적이기 때문에 계단도 아닌 엘리베이터에서의 짧고 어색한 만남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아파트 중심 공간에서 공공광장과 같은 접촉의 장을 통해서라도 공공성과 커뮤니티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발맞춰 세워진 수도권 신도시들은 수도권의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많은 수도권 주민들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 하지만 수도권 신도시의 인구 과밀 등으로 인해 적지 않은 문제가 파생됐으며, 직주균형(職住均衡)이 보장되는 교외도시를 꿈꿨던 기존의 목표와 달리 자족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를 겪었다. 향후의 신도시 개발의 계획 과정에서는 주택 밀도의 완화와 직주균형의 추구를 통해 쾌적한 삶의 질을 보장하고,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한 문화도시계획을 반영해 기존 신도시 거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신도시의 정체성 확보를 동시에 도모해야 할 것이다. 정책 입안자들이 정치적 손익 등에 좌우되지 않고, 해외의 성공한 신도시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시민들이 살기 좋은 공간, 독창성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 열중한다면, 독립된 정체성을 가진 자생적 3기 신도시의 탄생이 요원한 일은 아닐 것이다.

 

*상업·업무 용지: 금융, 회계 등의 생산자 서비스를 포함하여 오피스 기능이 주로 입지하는 용도의 토지를 가리킨다.

*상업용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가 기능이 입지하는 용도의 토지를 의미한다.

인포그래픽: 황지연 기자 ellie0519@snu.ac.kr

삽화: 권민주 기자 kmj4742@snu.ac.kr 홍해인 기자 hsea97@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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