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마음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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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신문
  • 승인 2019.05.19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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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 ‘퍼포논문’ 공연 ‘노래의 마음’과 강의라는 퍼포먼스에 대해

한국에 돌아와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지 두 달 남짓 됐다. 몇몇 수업을 진행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하게, 모든 강의는 일종의 퍼포먼스임을 체감한다. 주어진 시간을 홀로 채우며, 흐름의 강약을 조절하고, 언표되는 내용이 잘 전달되게끔 말과 몸짓의 더께를 쌓고, 골고루 눈을 마주치고, 눈을 마주치는 동안 되도록 진실할 것. 피로와 권태를 숨기되 아주 연기하지는 말 것. 지식의 매개체가 되면서도 나 자신으로 설 것. 그러나 적당히 거리를 취하고, 가끔은 지워질 것. 그렇게 매주 새로운 퍼포먼스를 구성하고 수행하는 일이 이내 새로운 나를 구성하고 수행하는 일로 이어졌다.

20세기 후반 서양의 학문과 예술에서는 ‘수행적 전환’(performative turn)이 일어났다. 인간의 모든 실천은 수행되고 반복되며, 주체는 행위함으로써 구성된다는 인식이 인류학, 언어학, 공연학 뿐 아니라 현상학,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이론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특별히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일상 속 모든 행위가 일종의 퍼포먼스임을 폭로하며, 막 뒤에서 준비된 사회적 역할을 현실 무대에서 개인이 어떻게 공연하는지, 그로써 어떻게 자아를 프리젠테이션하며 살아가는지를 연극의 프레임을 통해 분석한다. 그리고 이에 비춰 말해보자면, 이즈음의 나는 맡은 바 역할을 입고 준비된 강의를 수행(perform)함으로써, 날마다 조금씩 강사로 만들어지고, 또 표현되고 있다.

지난해 6월, 한국 실험극 역사의 주요 거점이었던 ‘삼일로창고극장’이 새롭게 재개관했다. 나는 거기서 마련된 ‘퍼포논문’이라는 기획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것은 공연에 관한 ‘논문’을 일종의 ‘공연 텍스트’로 변환해 그로부터 또 하나의 ‘공연’을 만들어낼 것에 대한 요청이었다. 애초에 기획자가 기대했던 것은 잘 짜인 ‘렉처 퍼포먼스’(lecture performance) 형식의 공연이었다. 강의를 하는 것과 같은 구현 방식을 취하는 퍼포먼스. 그 같은 형식 속에서 논문의 내용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일.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모든 강의가 퍼포먼스인 것과 무대에서 실제 강의를 하는 것이 그대로 하나의 퍼포먼스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엄밀히 말하면 각 경우에 있어 퍼포먼스라는 개념의 범주가 다른 것이다. 전자는 인간이 살아가며 수행하는 일의 연극적 근원을 말하며, 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 자체와 구별되는, 누군가 금전과 시간을 들여 고유한 체험을 하기 위해 보러 오는, 어떤 방식으로든 예술적으로 승화된 행위를 지시한다. 두 개념을 쉽사리 일치시키면 일상의 제 행위를 그대로 무대에 올려도 무방하다. 모든 것은 예술이 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진정 삶과 예술의 등치를 꿈꾸었던 저 70년대의 퍼포먼스에서조차 예술가는 일상적 행위를 무턱대고 예술적 행위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 행위에 예술적 행위의 결을 공들여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이에 대한 오해가 한국 예술계에 팽배함을 느낀 것은 오래된 일이다. 개념적인 작업이 부상하면서, 마치 개념만으로 예술이 성립된다는 듯한 제스처가 앞다퉈 취해지고 있다. 보다 심각한 것은 이 제스처가 쉽사리 개념을 입어 오만해진다는 것이다.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이해하지 못한다고 간주되는—관람객은 소외된다. 그가 흥미를 갖지 못하는 것은 그의 무지 때문이다. 불편과 불쾌를 조장하는 것은 예술가의 정당한 의도였다. 아름다움을, 완성도를, 작품성을 강요하지 말라. 그것을 강요하는 일은 구시대적이다.

며칠 전 국립극단에서 ‘국립공단_무아실업’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봤다. 직업 예술가로서 연극을 하는 일은 노동하는 것과 같음을 고민하며, 직접 회사를 차리고 노동자를 고용해 관객의 눈 앞에서 한 시간 동안 동전 분류 작업을 하는 공연이었다. 연극이 노동임을 폭로하고자 그들은 다만 노동을 수행했다. 노동 자체가 저절로 연극이 되기를 티 없이 꿈꾸면서. 그 선택에 개념적 의의를 부여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그 선택이 안일함이라 말하겠다. 모든 연극이 노동인 것과 무대에서 노동을 하는 것만으로 연극이 이뤄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기 때문이다. (유일한 다행은 그 한 시간 동안의 지리한 ‘관극 노동’에 대해, 관객들이 장부에 서명하고 8,350원의 시급을 받아 돌아간 일이었다. 한편 ‘시간 강사’도 물론 시급을 받는다.) 

퍼포논문 공연을 위해 내가 렉처 퍼포먼스의 형식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은 그 형식 자체가 결함을 품고 있어서가 아니다. 누군가는 분명 근사하게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퍼포먼스인 강의 일반과 무대화된 강의를 혼동하지 않고, 틈새를 만들고 예기치 못한 장면을 난입시키며 선연한 아름다움 속에서 관객들을 데리고 멀리까지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표되는 내용보다 더 깊은 것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게 논문에 관한 렉처를 예술적 퍼포먼스로 승화할 미적 창조력이 결여돼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미학을 공부하기로 한 것조차도 스스로 예술가가 될 만한 깜냥이 없음을 기꺼이 직시한 뒤, 예술 가까이에서, 나를 가슴 뛰게 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변호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2017년, 나는 「재현불가능한 것을 다루는 동시대 공연에서의 몸의 장치들에 대하여」(Les dispositifs corporels sur la scene contemporaine traitant de l’irrepresentable)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을 마무리했다. 재현불가능한 아픔들을 주제로 삼는 몇몇 동시대 연극이 어떻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재현불가능한 실재를 우회해 다양한 재현적 장치를 둠으로써 관객의 몸과 마음을 건드리는지에 대한 논문이었다. 이때 재현불가능한 것이란 무엇일까. 다소 거칠게 요약하자면 첫째, 감각적으로 지극히 강렬한 트라우마적 사건들은 애초에 상징과 언어를 벗어나기 때문에, 또한 그것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재현이 불가능하다. 둘째,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재현, 곧 시대가 구축한 정치적 질서 바깥으로 배제된 것들은, 그 세계 속에서 그 세계의 언어로 다룰 수 없다. 논문에서 나는 이 두 가지가 거의 언제나 뒤얽혀 있다고 봤고, 그런즉 감각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재현이 불가능한 아픔들을 다루는 예술에 주목했다.

그 예술들이 고통스럽게 만들어지리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그런 예술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쓰는 이론가 또한 고통받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재현불가능한 것을 다루는 예술이 있고 그 예술을 다루는 논문이 있을 때, 이론가가 껴안아야 하는 것은 겹겹의 거리, 아픔 자체뿐 아니라 아픔에 대한 앎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지지부진했다. 나는 종종 오래 누워있었고, 며칠씩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하루의 빛이 해의 궤적을 따라 내 방의 노란 벽에 스몄다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논문을 ‘수행한다는’ 것은 내게 그런 일이었다. 견디는 일이었고, 그저 살아있는 일이었다.

그해 봄부터 노랫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 일은 문득, 우연처럼 발생했다. 가사를 문자로 전송하면, 금세 음악이 돼 머리맡에 도착했다. 지금도 파리에 살고 있는, 나의 벗 최정우 씨로부터 오는 구조의 신호였다. 그는 학번이 한참 높은, 학교에 다니던 동안은 마주친 일 없는 미학과 선배로, 세기말의 4년 동안 『대학신문』에서 만평/삽화가로 일했고, 밴드 ‘레나타 수이사이드’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이며, 오랜 기간 연극 음악을 작곡해 수많은 공연에 참여했던, 이론가이자 예술가다. 그의 존재는 이후 나로 하여금, 그가 책임져줄 수 있을 미적 형식의 완성도를 믿고, ‘노래의 마음’이라는 공연을 올리기로 마음먹게 한, 단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렇게 2017년 파리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타 이름을 따 ‘기타와 바보’라는 포크 듀오를 결성하고, 우리의 집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했다. 

“가만히 있으라 해놓고 구하러 가지 않았어요. 기다리시는 걸 알아 물 밖에서 울었어요. 세월이 흐른다는 말을 우리 쉽게 하지 못해요. 그래도 세월이 흘러갔어요. 맑은 날 옅은 구름이 연기처럼 흩날려 가요. 하늘 아래 있는 것들 바닷속에도 다 있던가요. 쓱 한 번 문지르면 입이 없어지면 좋겠어요. 그 없는 입으로 한 줌 뼈에 입 맞추고 싶어요.” 

-‘입 없는 입맞춤‒세월’(2017) 중

그러므로 나의 논문을 무대에서 다시금 ‘수행하는’ 퍼포먼스는 음악 공연의 형식 외에 다른 형식을 취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삼일로창고극장 바닥에 세운 작은 단 위에 나란히 앉아 우리의 노래를 불렀다. 노래 자체가 일종의 우회였지만, 노래의 주위에도 각종 우회로를 팠다. 가령 ‘천문’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동안 드문드문 유성우가 떨어지다가, 노래가 끝나면 환상처럼 동그랗게 쏟아지는 별들의 포물선이 까만 하늘을 덮고, 이내 뚝뚝 직선으로, 진눈깨비로 내려 흩어지는 영상을 뒤로 한 채 ‘소리 없이 진눈깨비’를 불렀다.

“바닥에 닿으면 녹아 흘러버리기로 하는 말 없는 아픔.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모양의 단념한 침묵들이 있을까” 

-‘소리 없이 진눈깨비’(2018) 중

‘입 없는 입맞춤‒세월’을 부르기 전에는 최정우 씨가 어쿠스틱 기타의 현을 긁다, 오래된 극장의 거친 돌벽 앞에 가 일렉 기타로 울음을 울었다. 그때 세월호 전원 구조 속보 음향을 편집해 틀자, ‘야, 어떻게 군대가 총동원돼서, 헬기, 해군 함정들까지 다 합해서 저렇게 구조하는 것을 보면서, 참 우리 대한민국 대단하다는 생각 듭니다. 참 우리 대한민국 대단하다는 생각 듭니다.’라 반복해 말하는 목소리의 끔찍한 질감이 극장을 뒤덮었다. 그밖에 예술과 이론 사이에 낀 중간자적 존재론을 각자 이야기하고, 재현불가능한 것에 대해 논문에서 다루지 않은 세 번째 심급을 말하거나, ‘여자에게’라는 노래 앞에 안젤리카 리델의 희곡을 낭송했다. 

“그들은 그녀를 안 죽이기로 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했지.” 

-‘힘의 집’(2009) 중

마지막 곡으로 ‘영원 속에서라면 사랑하지 않았을 거예요’를 부르기 전에는, 임흥순 작가의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2017)이라는 영상의 끝에 김동일 운동가가 들려준 자작시의 구절을 화면에 띄웠다. 억울한 죽음을 슬퍼 마시고, 한라산 제일 높은 데 솔나무가 되어, 당신들은 낙락장송하시라는 문장을 관객들이 바라볼 때, 최정우 씨는 기타를 연주하고 나는 까만 객석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꽃이 지는 일을 슬퍼 말아요. 우리는 반드시 헤어지고 말아요. 시들지 않는다면 의미 없는 일이에요. 영원 속에서라면 사랑하지 않았을 거예요. 영원 속에서라면 사랑하지 않았을 거예요.” 노래가 끝나고, 마지막 대사를 읊었다.

소리는 나를 떠나 공간을 유영하고 나는 그것을 되받아 듣지만 끝내 잡지 못한다. 연극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 음악은 끝이 난다. 때로 어떤 노래가 영영 끝나지 않기를 꿈꿨다. 그러나 시작도 끝도 없이 편만한 그 소리를 우리는 사랑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공연은 꿈이었다. 모든 공연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극장의 한 줌 무대는 삼십분도 안 걸려 분해됐다. 그렇다면 다시 강의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 내가 무대에서 수행하기를 단념했던, 대신 이 봄의 현실 속에서 절절히 통과하고 있는 그 또 하나의 퍼포먼스를. 그것 또한 사라지리라는 것을. 논문도, 노래도, 공연도, 강의도, 수행하는 동안에는 실시간으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아주 많이 반복되고 익숙해지면, 그때는 자연히 가면이 얼굴에 들러붙게 될 것이다. 나의 행위가 나의 본질—애초부터 없던—을 대체할 것이다. 그때는 그때대로 물론 힘들 것이나, 어쩌면 퍽 자유로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생생하게 모든 것들을, 모든 학생들의 표정과 모든 순간의 공기, 마음에 일어온 따스함과 슬픔 같은 것들을 이렇게 겪어낼 수 있는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영원하지 않을 것이기에, 지금의 수행을 우리는 사랑한다. 첫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학생들은 관객 같이 무섭다. 나는 가수처럼 초연해야지.”

목정원 강사(미학과)
목정원 강사(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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