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 뉴욕 한복판에서 영화의 미래를 보다

 

3월 마지막 주말, 미국 뉴욕의 콜롬버스 서클을 사이에 두고 약 1.7km 떨어져 있는 ‘뉴욕현대미술관’과 ‘링컨센터 월터리드극장’ 주변에는 무지갯빛의 홍보 현수막 몇 장이 바람에 펄럭였다. 겉으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월터리드극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색다른 활기가 느껴졌다. 각종 책자와 포스터가 진열돼 있고, 포토월이 마련된 내부 대기실에서는 영화계 관계자부터 관객들까지 한데 모여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상영시간이 다가오자 자리가 정해지지 않은 표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배우도 관객과 함께 영화관 뒤편에 자리를 잡고 자신의 작품을 끝까지 감상하기도 했다. 넓은 극장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도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내딛는 신인 감독을 위한 조용한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바로 ‘뉴디렉터스/뉴필름 영화제’(New Directors New Films, ND/NF)다.

 

전 세계 신인 감독들의 가능성을 엿보다

ND/NF는 매년 봄에 열린다. 11월 ‘뉴욕 영화제’가 열리고 나면 다음 영화제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고려해서 봄으로 시기를 정한 것이다. 영화제가 개최되는 시기 때문에 ND/NF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매년 1월 말에서 2월 초에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선댄스 영화제’가, 매년 3월 초에는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영화제’가 열리면서 우수한 신인 감독 자원을 후발주자에 뺏겼기 때문이다. 선댄스 영화제는 토론토 영화제, 뉴욕 영화제와 더불어 북미 3대 영화제로 꼽히는 큰 행사다.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는 1994년 시작했지만, 영화와 음악을 결합한 신선한 기획으로 입소문을 타며 급성장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ND/NF를 주최하는 뉴욕현대미술관과 ‘링컨센터 필름소사이어티’는 다른 영화제와의 차별화를 꾀했다.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로 주제를 좁혀나가는 한편, 제3세계 작품을 발굴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었다.

1972년 첫발을 내디딘 ND/NF는 올해로 48번째를 맞이했다. 뉴욕 영화제를 주최하는 링컨센터 필름소사이어티는 록펠러 재단에서 기부한 1만 5,000 달러의 자금을 ND/NF라는 새로운 영화제를 개최하는 데 사용하기로 했다. 영화감독 윌라드 반 다이크를 통해 뉴욕현대미술관과 링컨센터 필름소사이어티의 협업도 성사됐다. 전 세계 신인 감독들이 내놓은 작품성 있는 신작을 소개하겠다는 것이 영화제의 취지다.

지난 3월 27일부터 4월 7일까지 ‘ND/NF 2019’가 개최됐다. 올해는 4대륙 29개국에서 출품한 35개의 장편 및 단편 작품이 상영됐는데, 이 중 약 31%인 11개 작품이 신인 감독의 장편 입봉작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 홍콩과 캄보디아 출신 감독의 작품이 소개됐다. 상영작 중 약 66%에 달하는 23개 영화에 감독, 작가 혹은 배우가 참석하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마련돼 있었다. 관객과의 대화는 짧게는 15분, 길게는 1시간 동안 이어졌다. 매시간 링컨센터 필름소사이어티 데니스 림 부의장, 뉴욕현대미술관 라젠드라 로이 부관장 등 유명 필름 큐레이터가 돌아가며 직접 진행을 맡아 깊이 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냈다.

지난 3월 28일 밤 월터리드극장에서 〈더 플레이저리스트스〉 상영 직후 데니스 림이 진행하는 관객과의 대화가 열렸다. 피터 패로우 감독, 제작자인 제임스 키에니츠와 제임스 폴 달라스가 참석했다. 30분 동안 베타캠으로 촬영한 이유 등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지난 3월 28일 밤 월터리드극장에서 〈더 플레이저리스트스〉 상영 직후 데니스 림이 진행하는 관객과의 대화가 열렸다. 피터 패로우 감독, 제작자인 제임스 키에니츠와 제임스 폴 달라스가 참석했다. 30분 동안 베타캠으로 촬영한 이유 등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어떤 영화를 만나볼 수 있을까?

ND/NF 2019에서는 12일간 스무 편이 넘는 장편영화와 단편영화 프로그램 두 편이 뉴욕의 관객들에게 소개됐다. 이 중 ‘단편 프로그램 1’은 콜롬비아, 스페인, 그리스, 브라질, 캄보디아 그리고 아르헨티나 출신 감독이 만든 30분 미만 단편영화 다섯 편으로 구성됐다. 다섯 편 모두 자국어로 만들어졌고 북미 지역에서는 ND/NF에서 최초로 개봉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내용의 일관성은 없었다. 오토바이를 훔친 한 남자의 이야기에서 브라질 바이아 지역의 신비로운 생활상을 담아낸 다큐멘터리까지 가지각색의 소재가 등장했다.

단편 프로그램 1의 〈엑토르 말로: 한 해의 마지막 날〉(2018)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주인공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반복되는 상실과 재발견의 이미지로 설명되는 주인공의 내적 성장은 지나치게 은유적이다. 재클린 렌조 감독은 “조역의 도움이나 묘사 없이 영화 속의 장면만으로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려 했다”며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 방식을 설명했다. 그는 “주인공의 심리가 담긴 편지와 일기장을 배우에게 읽게 함으로써 순간적이고 자발적인 감정을 표현하도록 했다”며 “촬영 전 리허설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단편 프로그램 1’의 다섯 영화 모두 이야기가 느슨했다. 감독들은 영화를 장면과 장면 간의 콜라주로 설명하며 이런 전개의 느슨함이 의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빅 브릿지〉(2018)의 시몬 벨레스 감독은 “영화를 찍으며 내가 맞이한 여러 상황을 연결하는 데 집중했더니 완성본에 콜라주 같은 느낌이 묻어났다”고 표현했다. 재클린 렌조 감독 또한 “일상은 순간의 콜라주”라며 “오늘 상영된 다섯 편의 영화는 모두 생략적인 요소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감독들은 이야기 해석을 관객의 몫으로 남겼다. 재클린 렌조 감독은 “단편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는 개인화된 감상을 느낄 기회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에코즈〉(2019)의 루실라 마리아니 감독은 단편영화의 매력으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찾아내게 한다는 점”을 꼽기도 했다. 

상영작 간 시너지를 일으키는 독특한 편성도 이 영화제의 특징이다. 〈더 플레이저리스트스〉(2019)의 일부분은 〈MS 슬라빅 7〉(2019)에 앞서 상영됐다. 〈MS 슬라빅 7〉은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특징이 있다. 토론토로 이주한 폴란드 여류 시인인 증조할머니를 둔 소피아 보다노비치 감독의 가족사가 서사의 핵심을 구성하고, 델라 캠벨 감독이 주인공 ‘오드리’로 분한다. 보다노비치 감독은 “편지라는 사물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에 담겨 있는 역사도 중요하다”며 “편지에는 오드리의 가족력이 뿌리내려가는 방식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오드리를 연기한 캠벨 감독은 “실제로 존재하는 증조할머니의 편지라는 자료에 오드리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부여하는 작업이 재밌었다”고 밝혔다. 보다노비치 감독은 “이 영화에는 실제 내 경험이 많이 있어 자서전 같기도 하지만, 현실의 내 상황과 부조화를 이루기도 한다는 점이 독특하다”며 현실의 자신은 영화감독이 되기까지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영화 속 오드리의 부모님은 오드리가 좀 더 실용적인 직업을 찾도록 강요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감독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와 재기발랄한 상상이 담긴 픽션이 뒤섞여 있는 〈MS 슬라빅 7〉이 〈더 플레이저리스트스〉와 함께 상영된 이유는 무엇일까? 두 영화가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확실성을 다른 태도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데니스 림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더 플레이저리스트스〉를 “확실성에 대한 페티시”라고 표현한 바 있다. 실제 경험의 빈 부분을 상상으로 메운 〈MS 슬라빅 7〉과는 대비되는 평이다. 소설가인 애나와 영화감독인 타일러는 클립이라는 노인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며 들은 이야기를 옮기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애나는 타일러와 자신이 클립의 이야기를 실제로 들은 것도, 애초에 그 이야기가 클립이 실제로 경험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각본 작업에 참여한 제임스 키에니츠는 “사실 애나와 타일러는 클립과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실제 배우들도 오늘 관객과의 대화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는 끝나도 이야기는 남는다

점심 무렵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월터리드극장 주변은 온종일 상영관에 머물며 영화를 보는 평론가와 시네필로 북적였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로비에서는 관객이나 평론가는 물론 영화감독, 배우까지 격의 없이 한데 모여 영화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뉴욕주엔 뉴욕대, 시라큐스대, 컬럼비아대 등 영화학 전공이 유명한 학교가 많다. ND/NF는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에게는 전 세계 신인 감독의 작품을 접할 좋은 기회다. 개막 및 폐막작을 제외한 모든 영화를 50달러에 볼 수 있는 ‘학생 패스’는 영화제가 개막하기 일주일 전 일찌감치 매진됐다. 상영관 주변에서는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도 눈에 띄었다. 학생 패스를 구매해 영화를 보러 왔다는 진 해리스 씨는 “영화를 보는 것은 물론이고 인맥을 쌓기 위해 오기도 한다”며 “함께 일했던 사람을 소개받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앤드류 윌슨 씨는 “ND/NF 전에 열리는 ‘랑데부 영화제’에도 학생 패스가 있다”며 “학교나 링컨센터 등 여러 곳에서 작은 영화제가 자주 열리는 것이 뉴욕의 매력”이라 자랑했다.

뉴욕 시민에게 ND/NF는 전 세계 신인 감독의 작품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자리인 동시에 영화계의 현재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행사다. 올해 상영작 35개 중 1개 영화는 전 세계에서, 21개 영화는 북미 혹은 뉴욕에서 최초 상영되는 작품이었다. ND/NF는 단순히 새로운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앞으로 영화계가 나아갈 모습을 이야기하는 대화의 장이었다.

올해는 한 작품도 상영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ND/NF에 진출한 한국영화는 총 9편이다. 〈박하사탕〉(2001)과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4) 같이 흥행한 장편 상업영화부터 조금은 아쉬운 성적표를 받아들었던 〈고양이를 부탁해〉(2002)와 〈해무〉(2015), 예술영화인 〈춘천, 춘천〉(2017)까지 출품작의 스펙트럼이 넓다. 흥행작과 실패작,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단편영화와 장편영화 등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초청작은 신인 감독이 자신의 재능을 펼친 작품이라는 단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도 ‘미쟝센 단편영화제’가 신인 감독 등용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경쟁부문으로 심사한다는 점, 장르영화*만 대상이 된다는 점 등 여러 차이가 있지만, ND/NF처럼 신인 감독의 등용문이자 영화인 교류의 장이 될 수 있는 영화제가 한국에서도 단단히 뿌리내리길 바란다.

*장르영화: 분류 가능한 형식과 줄거리를 갖춘 영화

삽화: 송채은 기자 panma200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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