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와 3·1 운동,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다
천도교와 3·1 운동,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다
  • 양수연 기자
  • 승인 2019.05.19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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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동학농민전쟁 125주년, 동학-천도교와 3·1 운동의 관계를 돌아보다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 함성이 이 땅에 울려 퍼진 지 올해로 100년이 됐다. 1919년은 우리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해다. 1910년 국권피탈 이래로 일제 치하에서 핍박받아온 한민족은 3·1 운동을 통해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분출했다. 민족대표 33인은 조선이 주권을 가진 독립국임을 천명했고,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의 근간인 임시정부의 창설로 이어졌다. 일시에 이런 거국적인 운동과 변화가 나타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3·1 운동의 동력이 축적돼온 배경을 잘 살펴보면 동학의 적통을 잇는 ‘천도교’라는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적인 예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천도교 신자였으며 이 중 9명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였다. 『대학신문』에서는 3·1 운동을 중심으로 천도교가 수행한 정치·사회적 기능을 조명해봄으로써 그 영향력과 의의를 살펴봤다.

 

 

 

1919년 3월 1일 만세 함성이 울려 퍼지기까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 배경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 재편의 원칙으로 제창돼 우리 민족에 독립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불어넣어 준 민족자결주의 정신이 있었다. 또한 3·1 운동에 한 달 앞서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도 독립에 대한 열기를 고조시켰다. 민족대표 33인은 지방민들이 서울로 모여드는 고종의 인산일을 전후해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고, 3월 1일 거사를 일으켰다.

3·1 운동은 일제 치하 가장 큰 규모의 독립운동이자 한반도 주민들이 계층과 이념을 떠나 하나의 민족으로 결집한 계기였다. 허수 교수(국사학과)는 “3·1 운동의 가장 큰 의의는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일체감을 느끼고 민족적 주체로서의 역량을 자각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방향도 3·1 운동을 기점으로 중요한 전환을 맞이했다. 이전에는 상층 지식인이 민족운동을 주도했지만 3·1 운동을 계기로 일반 대중이 민족운동을 이끄는 주체로 자리 잡았다. 독립선언에 이어 정부 체제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이후 수립될 정부의 형태로 민주공화제 이념이 정착됐다.

3·1 운동이 이런 성과를 거두기까지는 종교계의 노력이 컸다. 1910년대의 엄혹한 무단통치 기간 동안 조선총독부는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탄압했다. 고정휴 교수(POSTECH 인문사회학부)는 “1910년대에 국내에서 대중적 기반을 갖고 있었던 집단은 종교 단체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모두가 종교 지도자였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천도교는 그 가운데서도 3·1 운동 전반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손병희를 비롯한 15인의 천도교 지도자들은 타 종교와 먼저 접선하는 등 주도적으로 독립시위를 계획해나갔다. 김정인 교수(춘천교대 윤리교육과)는 “천도교 측 대표들은 20세기 전후로 동학농민전쟁, 민회운동, 유학생 단체 간부 경험 등 다양한 정치 경력을 지닌 반면 이승훈을 제외한 기독교 측 대표들은 그런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천도교에서 세운 ‘보성사’는 2만 1천매의 「독립선언서」 전단을 제작하고 천도교 교구를 중심으로 배포했다. 허수 교수는 “전단 인쇄비를 비롯해 3·1 운동에 소요된 비용 대부분을 천도교 측이 부담했다”며 “천도교 조직망이 널리 활용돼 3·1 운동이 조직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동학에서 천도교로, 그들이 걸어온 민중의 길

 

천도교는 개인의 수양을 중시하는 종교인 동시에 민족이 처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서 시작해 3·1 운동을 적극적으로 계획하고 전개하기까지 천도교는 종교와 사회운동 사이에서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동학은 내부적 모순과 외세의 침입으로 기존의 가치질서가 붕괴해가던 조선 후기에 창시됐다. 최제우는 가난과 부조리에 신음하던 당시 민중에게 시천주(侍天主)와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을 전파했다. 시천주는 한울을 모신다는 뜻으로, 인간은 마음속에 하늘을 품을 수 있어 누구나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후천개벽은 선천(先天)이 끝나고 모순이 해소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의미다. 동학이 내세운 기치에는 기존 질서의 폐단을 바로잡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녹아 있었다. 그렇기에 동학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의 바탕이념이 됐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이병규 연구조사부장은 “동학농민전쟁에는 평등을 추구하며 외세의 침입을 비롯한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려 한 동학의 정신이 반영돼 있다”고 설명했다. 비록 동학농민전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민족이 처한 현실을 개혁하려 노력했던 경험은 민중의 인식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이후 동학은 무력 투쟁에서 문명개화노선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계속된 대한제국 정부의 탄압으로 지도층이 노선갈등을 벌이는 가운데 3대 교주 손병희는 일본에서 근대 사회의 사상적 조류와 정세 변화를 경험했다. 김정인 교수는 “손병희는 반봉건·근대화를 계속 추진하려면 대세에 조응해 문명개화를 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손병희는 1904년 진보회라는 민회를 조직해 생활 개선과 실력 양성을 추구했다. 그뿐만 아니라 진보회는 정치·사회 개혁을 요구하며 민회의 정치 세력화를 도모했다. 김 교수는 “손병희는 민회운동을 통해 사회에 근대적 기제를 세우는 과정에서 동학을 합법화하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동학은 근대적 사상을 실현하는 동시에 정치 도구로도 기능했다.

하지만 문명개화노선을 따르는 과정에서 동학의 일부는 손병희의 통제를 벗어나 친일 단체인 일진회와 합병하며 위기를 맞았다. 일진회는 1905년 을사늑약을 옹호하는 등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단체였다. 이에 손병희는 친일정치세력과 단절하려는 목적으로 천도교를 창건해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웠다. 허수 교수는 “손병희는 서양의 종교 담론을 빌어 표면적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표방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이후 천도교는 운신의 폭이 좁아져 소극적인 태도로 종교 활동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천도교는 언론 및 교육 사업을 바탕으로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며 이면에서 민족운동을 이어가고자 했다. 1906년 보성사에서 창간한 「만세보」는 논설을 통해 반민족 행위를 규탄하고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또한 천도교는 일본으로 유학생을 보내고 학교를 설립하는 등 실력 양성에 힘을 쏟았다. 종교 교리를 체계화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노력이 계속됐다. 허수 교수는 “손병희는 성신쌍전(性身雙全)*을 강조하며 정신교화와 물질적 제도의 개혁 모두를 중시했다”며 “이를 통해 천도교의 현실참여를 정당화하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천도교가 3·1 운동 때 자금을 전담할 수 있었던 것은 일진회와 분리되며 악화된 교회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실시한 성미제 덕분이었다. 김정인 교수는 “교인들에게 헌금으로 쌀을 받는 성미제는 특히 1918년 일본의 쌀 폭동으로 쌀값이 폭등하면서 교회 재정 확보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국권피탈 이후 총독부의 탄압이 거세졌지만 천도교는 입교 선풍을 맞아 교세를 크게 늘렸다. 김정인 교수는 “천도교는 동학 세력의 후신으로서 일제의 잔혹한 통치에 시달리는 민중에게 위안과 희망의 전도사로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했다. 활발한 민족운동은 불가능했지만, 천도교는 민중의 생활을 개선하고 계몽·문화운동을 지속해나갔다. 고정휴 교수는 “식민지배체제에서 손병희는 교단 유지를 위해 대외적으로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저항을 유보했지만 실제로는 민족운동의 방안과 적기를 살피고 있었다”고 말했다. 천도교 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사회의 가치질서를 근본적으로 재건하려는 세계개조의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주도적으로 독립시위를 계획했다. 이들은 수차례의 회합을 거쳐 처음에는 다소 미온적이었던 기독교계 인사들을 설득해냈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3월 1일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가 만천하에 울려 퍼질 수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그늘진 곳 한편에서

 

 

3·1 운동 전후로 천도교인은 100만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현대인에게 천도교는 그다지 익숙한 종교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큰 규모와 영향력을 지닌 민중종교였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의 구성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교주 손병희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천도교는 3·1 운동에서 확립된 민주공화제 이념을 바탕으로 사회사상과 구체적인 정치 담론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1920년에 천도교 소속의 이돈화 등이 중심이 돼 출간한 종합잡지 「개벽」이 이런 관심을 잘 보여준다. 허수 교수는 “「개벽」의 정체성은 서구에서 온 사회개조론의 흐름이 동학 내부의 후천개벽 사상과 결합한 데 있다”고 분석했다. 이돈화는 종교 사상가였음에도 ‘신앙성과 사회성’ 담론을 통해 교인들이 종교에서 사회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민족의 정치적 현실에 천착해 다양한 기조를 내보였다. 허 교수는 “사회주의 세력이 급부상해 민족주의계와 대립하며 여러 사회개혁 담론이 오가는 가운데 이돈화는 천도교 교리를 바탕으로 둘을 절충하는 ‘범인간적 민족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천도교의 사회 참여적 성격은 일제강점기 말 지도층이 분열을 거듭하며 점차 약화됐다. 그토록 큰 교세를 구가했던 민중종교는 근현대사의 그늘진 곳 한편으로 물러나는 과정을 겪는다. 일제에 타협해 개량적 노선을 취하던 중심 지도부가 결국 친일로 돌아서며 천도교는 민족주의적 기반을 잃었다. 해방 이후 분단체제에서 천도교의 조직 기반은 급속히 약화됐다. 김정인 교수는 “북한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진전되며 천도교는 청산 대상이 됐고, 남한의 친미반공체제하에서도 몰락의 과정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천도교가 지니는 영향력은 미미하지만, 우리나라의 근현대 민족운동사에서 천도교가 남긴 족적은 매우 크다. 이병규 연구조사부장은 “동학의 창시에서부터 동학농민전쟁, 3·1 운동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이들이 천도교의 인간존중·사회개혁의 가치를 이어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 속에서 종교적 입지와 사회 참여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천도교는 민족의 내일을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허수 교수는 “종교로서의 동학·천도교는 위기의식을 내적 수양으로 다잡는 동시에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흐름을 함께 담지했다”며 “이런 정체성을 통해 ‘종교적 사회운동’으로서 천도교가 갖는 의의를 가늠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동학은 사회의 위기에 대응해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종교이다.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는 사회 정세의 변화 속에서 분열을 거듭했지만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하려는 의식을 근본에 두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헌법 전문에 새겨진 3·1 운동의 유구한 정신은 조명되지 못한 민중종교의 역사에 빚을 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도교가 구도(求道)와 참여의 힘으로 우리 민족의 저항사에 새긴 중요한 의의를 오늘날 되돌아봐야 하는 까닭이다.

*성신쌍전(性身雙全): 가르침으로 마음과 몸을 모두 완전하게 할 것을 주장하는 천도교 교리다.

 

삽화: 홍해인 기자 hsea97@snu.ac.kr

권민주 기자 kmj474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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