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한반도는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전쟁 도중 약 13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만연했던 민간인 학살은 우리와 동떨어진 일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지금 밟고 서 있는 땅 바로 위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기억하는 이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대학신문』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의 현장을 되돌아보고 상처와 치유, 회복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세월은 흐르지만, 상처는 여전히

그림①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를 발굴할 수 없어 가묘의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그림①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를 발굴할 수 없어 가묘의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그림③ 대전 지역 민간인 학살지를 기념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념비를 훼손했다.
그림③ 대전 지역 민간인 학살지를 기념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념비를 훼손했다.

 

휴전 후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주변의 달갑지 않은 시선과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배·보상 문제로 인해 민간인 학살의 상처는 아물지 못한 채 피를 흘리고 있다. 총 세 차례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대전 산내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린다. 한국전쟁 발발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3일간 첫 번째 학살이 일어났다. 당시 미군의 전투일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경찰은 보도연맹에 가입 및 활동한 민간인과 재소자를 처형했으며, 처형된 인원은 약 1,400명으로 추산됐다. 하지만 당시 보도연맹에는 쌀과 비료를 받기 위해 가입한 농민들과 학생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같은 해 7월 3일부터 3일간 일어난 2차 학살에서는 여순 사건이나 제주 4·3사건 관련자를 포함해 1,800여 명의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 처형됐으며 확인사살도 이뤄졌다. 3차 학살은 같은 달 6일부터 11일간 이뤄 졌으며, 최소 1,800여 명의 재소자가 구덩이로 이송돼 학살당했다.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에서 대전 지역 민간인 학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기 때문에 일부 유족들이 민사소송을 통해 배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몇몇 형무소 재소자 유족들의 보상액을 삭감하는 등 이 과정도 온전하지 못했다.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임재근 교육연구팀장은 “유족들은 그들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회 속에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며 “이제는 사회의 인식이 바뀌어야 할 때”라고 전했다.

그림 ② 단양 곡계굴 내부. 동굴 안은 300여 명이 다 들어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협소했다.
그림 ② 단양 곡계굴 내부. 동굴 안은 300여 명이 다 들어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협소했다.

 

그림 ④ 취재 당일에도 곡계굴에서 자기 조각이 발견됐다. 피난민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그림 ④ 취재 당일에도 곡계굴에서 자기 조각이 발견됐다. 피난민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1951년 1월 20일 오전 10시경, 충북 단양 영춘면 곡계굴에 미군의 폭격이 행해져 그 안에 피신 중이던 피난민 약 360여 명이 질식사하거나 화상으로 목숨을 잃었다. 생존자 조병휴 씨(78)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겨우 굴 밖으로 나왔으나, 계속되는 기총사격 때문에 도랑으로 몸을 숨겨야만 했다”며 “기총사격이 끝나고 내려다본 눈밭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5월 21일 ‘단양 곡계굴 미군 폭격 사건’ 피해자 구제를 위한 미국 정부와의 협상, 위령 사업 지원 등에 나설 것을 권고하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위령 시설 건립 및 배·보상 등 후속 조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법원에서는 미군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한국 정부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은 법적 시효가 완성돼 기각당했다. 곡계굴 미군 폭격에서 고모를 잃은 단양곡계굴유족회 조병규 유족회장은 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 헌법소원 청구를 준비하고 있다. 조병규 유족회장은 여전히 학살의 고통이 이어지고 있다며 “국가가 국민의 재산과 생명에 끼친 손해에 대해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에 의해 들쑤셔진 상처

 

노근리 쌍굴다리와 남아있는 총탄 흔적. 동그라미 표시는 총탄이 스친 흔적이고 세모 표시에는 아직도 총알이 남아있다.
노근리 쌍굴다리와 남아있는 총탄 흔적. 동그라미 표시는 총탄이 스친 흔적이고 세모 표시에는 아직도 총알이 남아있다.

 

1950년 7월 23일, 충청북도 영동군 주곡리 주민들은 미군의 명령에 강제로 마을을 비워야 했다. 26일 노근리에 이르러 철로에 앉아있는 피난민들에게 미군은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피난민들은 쌍굴다리 아래로 몸을 피했으나 3박 4일간 계속된 미군의 사격으로 300명가량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한 유족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작가 정은용이 희생자들의 비극을 담은 소설 『버림받은 사람들』을 출간하고 미국 AP통신에서 이 사건을 대서특필함으로써 세계가 이를 주목했다. 2000년 한국과 미국 정부는 각각 조사단을 꾸려 진상 조사를 시작했다. 당시 미국 조사단은 미군이 노근리에 주둔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쌍굴다리에 박힌 총탄이 당시 미국에서만 사용됐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는 전쟁 중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라며 입장을 바꿨다. 한국 조사단은 한·미 우호 관계가 악화될 것을 고려해 생존자와 유족들의 증언보다 미군의 문서에 더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2004년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사건의 진상이 규명됐다.

 

쓰러진 위령비와 박산골에서 일어난 3차 학살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있는 총탄 흔적 바위.
쓰러진 위령비와 박산골에서 일어난 3차 학살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있는 총탄 흔적 바위.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은 세 차례 민간인 학살로 인해 피로 얼룩진 나날을 보냈다. 국군은 빨치산과 그들을 도운 적 있는 주민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펼쳤으나, 이적 행위에 대한 구별이 어려웠기 때문에 죄 없는 민간인들이 빨갱이로 몰려 희생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2월 9일, 청연만 앞 논들에서 1차 집단학살이 일어나 84명이 목숨을 잃었다. 6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인 김운섭 씨(77)는 살기 위해 도망치면서 옆구리에 총탄이 스치는 상처를 입었다. 김 씨는 “그 날은 눈이 발목까지 쌓였다. 발이 시려서 땅에 주저앉았지만, 얼른 일어나 산으로 뛰어가서 살아남았다”며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전했다. 다음 날 2차 집단학살이 일어나 탄량골에서 102명이 사망했고, 과정리 박산골에서 일어난 3차 집단학살에서는 533명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해 3월 거창 출신의 신중목 국회의원이 이를 폭로해 국회 합동조사단이 구성됐으나, 사건을 숨기기 위해 북한군으로 가장한 국군이 조사단을 습격해 현지 조사는 진행되지 못했다. 이후 외국언론이 이 사건에 주목하자 결국 정부는 이를 재조사하고 고등군법회의를 열어 관련자들에 실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이렇게 처벌된 사람들조차도 이듬해 특별사면돼 고위 간부에 오르는 등 처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유족들의 주도하에 유해가 수습되고 위령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족들이 구속되는 등 상황은 역전됐다. 정부는 유족들과 유족회 간부 17명을 반국가단체로 구속했다. 위령비는 정으로 쪼개져 매장됐으며 묘지는 파헤쳐졌다. 이처럼 국가가 은폐·왜곡했던 거창사건은 민주화 이후 위령 궐기대회를 갖고 땅에 파묻혔던 위령비를 세움으로써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치유와 회복은 언제쯤

노근리 평화공원 위령탑
노근리 평화공원 위령탑

 

아직도 유해발굴조차 시작하지 못한 민간인 학살지역이 허다하다. 또한 법적 문제가 복잡해 유해를 수습하는 것은 물론 제대로 된 배·보상을 받기조차 힘든 경우도 많다. 현재 수면 위로 떠오른 몇몇 사건을 제외하고는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위령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이미 발굴된 유해에 대한 관리도 미비하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유해발굴 업무를 담당했던 노용석 교수(부경대 국제개발협력학과)는 “국가를 위해 죽은 이는 위령하지만 국가에 죽임을 당한 이들은 위령하지 않는다”며 죽음에 위계가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노 교수는 “유해발굴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어 다른 단체나 법과 충돌하기 쉽다”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과거사정리법을 신속히 통과시키고 2010년 해산한 진실화해위원회의 뒤를 이어 2기를 출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무법인 동신 최경혜 변호사는 민간인 학살의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 법적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헌법재판소는 민간인 학살사건의 경우 불법행위로부터 10년이 지나면 형벌권이 소멸되는 객관적 소멸시효의 적용은 위헌이라고 결정 내렸다. 한편, 행위를 안 시점으로부터 3년이 지나면 완성되는 주관적 소멸시효는 여전히 적용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즉 진상규명 결정이 난 후 3년 안에 배상을 청구하지 않으면 배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상규명 결정문에는 청구를 하면 배상을 해주겠다는 고지가 없기 때문에 유족들은 결정문을 받고도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 채 시간을 보냈다. 최 변호사는 “이런 경우 한국 정부에 청구할 수 있다는 사실과 청구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가해자와 채권의 존재를 정확히 알았다고 보기 어렵고, 따라서 불법행위를 알았다고 보기 어렵다”며 주관적 소멸시효의 기산점 적용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동신 임상철 변호사는 소멸시효를 적용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임 변호사는 “법적 안정성을 위해 시효를 적용하는 것보다, 지금이라도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유족들과 피해자들이 배·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국가범죄를 판례로 남김으로써 후에 일어날 국가범죄를 억제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최 변호사는 “국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현실적으로 가능한 배상수단이 돈밖에 없으니 금전적 배상이 이뤄진다”며 “세금을 축내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가능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배상을 받기 위해 개인이 민사소송을 걸어야 한다는 점 역시 큰 문제다. 민사소송을 위해 유족들은 소송 비용과 변호사 선임 비용 등을 직접 마련해야 한다, 소송이 3심까지 길어지는 경우가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한다. 국가가 소유한 자료에 접근하기 어려워 증거 확보가 어렵고, 판사와 변호사의 논리 구조에 따라 각자 다른 판결이 나오는 점도 유족들의 민사소송을 어렵게 만든다. 노용석 교수는 “국가범죄에 대한 배상을 개개인이 민사소송을 통해 청구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국가배상법을 만드는 등 국가가 나서서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발짝 더 나아가, 공동체를 통해 민간인 학살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우리는 그 치유의 가능성을 노근리 평화공원에서 찾을 수 있다. 노근리는 아주 천천히, 조금씩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고 있다.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됨에 따라 노근리 평화공원이 준공됐다. 평화공원은 추모의 장소인 동시에 방문객들에게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알리는 장소로 자리매김해 유족들과 피해자들의 치유 과정을 함께 고민하고 있다. 노근리 평화공원 학예팀 이근향 씨는 “아직 남아있는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은 우리가 사건의 진상을 기억하고 인권과 평화의 의미를 더 깊이 고민하는 것”이라 전했다. 평화공원 측은 사격을 가한 미국을 가해자로, 폭격을 당한 민간인들을 피해자로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나아가, 전쟁 중 국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국가, 그리고 그들을 사지로 내몬 전쟁에 대해 더 깊게 사고하고 널리 알리려 노력하고 있다.

 

“민간 주민 및 민간 개인은 군사 작전으로부터 발생하는 위험에서 보호돼야 하며 적대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는 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은 금지한다. 또한, 민간인이나 민간물자가 집결돼 있는 도시나 마을을 다수의 명확하게 분리되고 구별되는 군사목표물 및 단일 군사목표물로 취급해 실시하는 포격이나 항공폭격은 금지한다." -전쟁 시 민간인 보호에 대한 제네바 협약 (1949.8.12.)-

 

삽화: 권민주 기자 kmj4742@snu.ac.kr, 홍해인 기자 hsea97@snu.ac.kr

레이아웃: 황지연 기자 ellie0519@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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