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필자가 학부생이었던 80년대 『대학신문』은 대학공동체 언론으로서의 역할보다는 거대 담론이나 학술, 철학, 사상 등과 같은 다소 무겁고 난해한 주제나 관련 논쟁 소개에 치중돼 있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필자에게 있어 『대학신문』은 친근함보다는 생경함과 소원함이 더욱더 강했으며 때로는 그 복잡하고 심오한 내용을 반드시 이해하고 알아야만 할 것 같은 강박감에 선뜻 접하기가 부담스러운 경이로운 존재로 느껴지기도 했다. 당시는 타교의 친구들과 우편을 통해 학보를 교환하며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때 타교의 친구들이 다들 자신들의 학보 이름은 ‘○○대학보’인데 왜 너희 학보만 이름이 『대학신문』이냐며 너희 대학만 ‘대학’인 줄 아냐고 힐난하곤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를 보면 『대학신문』의 ‘고상함’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느낌은 그들 또한 필자와 별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최근의 『대학신문』을 보면 그 지면의 무게감이 당시보다 매우 가벼워졌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경박하지는 않고 오히려 친밀성과 전문성이 더욱 강화된 느낌이 드니, 이는 『대학신문』이 구성원들의 다양한 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학내외의 시의적절한 주제를 선별해 보다 깊이 있는 기획기사들을 싣고 있는 것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지난 호에서도 사회, 학술, 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의 집중 취재와 특집 및 기획기사들이 실렸다. 관악구청 앞에 걸린 상반된 내용의 현수막에 대한 취재, 5G 기술의 원리와 활용 가능성 및 전망에 대한 특집, 최근 발표된 3기 신도시의 의미와 수도권 신도시의 문제점 등을 분석한 기획기사는 그 주제나 내용이 모두가 시의적절하고 전문적이면서도 우리가 궁금해하거나 혹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종합적이고 심층적으로 다뤄주고 있는 배려심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매 사안에 대해 중립적 관점을 유지하려 한 탓에 팩트 위주의 기사 전달에 한정된 아쉬움이 있으니, 설령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할지라도 『대학신문』만의 관점이나 평가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으면 좋았을 것 같다.

필자가 교수자의 입장인 까닭에 강의계획서를 준수하지 않는 수업의 문제점을 제기한 신문고 내용은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학생의 권리적 측면에서 많은 부분 수긍되는 부분이 있었다. 다만 교수자가 강의계획을 바꾸게 되는 원인이나 사유 또한 있을 것이기에 이와 관련한 해명이나 반론의 글 또한 함께 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글로벌 인재가 되기 위해 해당 분야의 전문성과 언어 능력, 의사소통 능력과 글로벌 매너를 갖출 것을 조언한 김부기 교수의 글에서는 비록 원론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학생들에 대한 따뜻한 격려와 응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과연 그렇게 노력하고 준비하기만 하면 글로벌 인재로 성공하고 인정받게 될 수 있을까? 삶에 있어 개인 노력의 정도가 그 결과와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듯 인생에서의 성공 또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노력하라는 조언 뒤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을 더했다면 열심히 노력했지만 성공에 이르지 못한 많은 사람에게 적어도 그 결과가 자신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라는 위로와 힐링의 말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주기평 강사

중어중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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