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를 만나다 | 『사람의 자리, 과학의 마음에 닿다』의 저자, 전치형 교수를 만나다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해 국민 경제의 발전에 노력해야 한다.” 현행 헌법의 ‘경제’ 항목인 제9장 제127조 1항이다. 언뜻 당연하게 들리는 이 문항을 삭제하자는 과학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과학을 경제발전을 위한 도구로 국한하지 말고, 진리를 발견하고 인간의 가치를 구현하는 원리로 삼자는 요청이다. 이처럼 ‘새로운 과학’을 바라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는 가운데, 전치형 교수(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는 지난달 발간된 칼럼집 『사람의 자리, 과학의 마음에 닿다』에서 ‘새로운 과학’에 대해 논했다.

지난 21일(화) 아침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만난 전치형 교수는 자신의 직업을 ‘과학을 옆에서 보고 관찰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전 교수의 전공은 STS(Science, Technology & Society), 우리말로 과학기술사회론이다. 과학기술사회론은 과학을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보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밝히는 연구를 수행한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과학잡지 「에피」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를 만나 과학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편견에 관해 얘기를 나눠봤다.

 

두 개의 자리

전치형 교수는 ‘사람의 자리’라는 제목 안에 두 개의 자리를 전제했다. 한 개의 자리는 과학 활동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을 위한 것이다. 실제로 전 교수는 책 곳곳에서 오늘도 꿋꿋이 실험실을 지키는 과학자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우리가 만난 과학자들 모두가 노벨상을 꿈꾸는 것은 아니었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한 학생이 “저는 프라이드가 있거든요, 우리는 과학하는 사람이니까”라고 말했을 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다 싶기도 했다. “공학자는 지금 시대에서는 노예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좀 풀어주면 좋겠는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 사회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누구나 그렇듯이 과학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생각과 처지를 말하고 싶어하고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 과학 지식의 심오함을 칭송하거나 경제 효과를 독촉하면서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학자의 삶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

- 『사람의 자리, 과학의 마음에 닿다』 중 

전치형 교수는 ‘과학자의 자리’가 얼마나 오랜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지를 강조한다. 현실의 과학자는 연구실에서 ‘성실히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그가 관찰했던 많은 과학자에게 연구는 기자재를 정리하고, 매일 실험 결과를 기록하고, 실험 후 비커를 설거지해야 하는 ‘고단한 몸놀림’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과학자 역시 출퇴근 시간, 휴식 시간, 임금과 인간관계를 두고 고민하고는 한다. 그러나 전 교수는 동시에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를 ‘예술과 종교’로 여기고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이 두 가지 측면은 ‘열정과 밥벌이’ 사이에서 묵묵히 일하는 과학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과학자들의 모습을 통해 과학적 지식이 결코 하룻밤의 영감과 꿈으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은 일을 통해 데이터를 쌓아가며 축적된 끈기의 결과임을 부각한 것이다.

또 다른 자리는 과학의 영향을 받으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리다. 전 교수는 ‘4차 산업혁명’, ‘00년 이후 세계’와 같은 미래 담론이 넘쳐나는 시대에 삶을 지탱하는 ‘메인테이너’(maintainer)들의 목소리는 잊히고 있다고 얘기한다. ‘maintain’(지키다)에서 파생된 메인테이너는 기술을 운용·관리·보수하는 사람을 뜻한다. 학계와 언론이 4차 산업혁명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동안 수많은 ‘구의역 김군’과 같은 메인테이너를 지키지 못했다는 그의 지적은 날카롭게 현실을 꼬집는다. 

이 때문에 전치형 교수는 우리 사회가 미래 담론에 열광하는 모습을 비판한다. 전 교수는 “미래에 대한 권위 있는 이야기로 여겨지는 미래 담론은 주로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며 “과학기술적 배경이 없는 사람들은 토론에 참여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런 이유로 미래 담론은 ‘정해진 미래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와 같은 적자생존의 문제로만 치환된다. 정작 미래 기술을 통해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와 같은 논쟁의 장은 공백으로 남는다.

과학과 정치를 엮어라

정보 처리력은 월등하면서 이해관계도 없고 편견도 없는 인공지능이 검사도 하고, 판사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심지어는 대통령도 맡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이름을 붙이자면 이것은 ‘인공지능 민주주의’다. … 그러나 빠르고 정확한 기계들의 ‘인공지능 민주주의’는 지루한 토론을 통해 편견과 오류를 수정해가며 하나씩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가는 민주주의를 낡고 답답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 『사람의 자리, 과학의 마음에 닿다』 중 

과학이 논쟁의 장이 돼야 한다는 말은 ‘정치’와의 관계로 이어진다. 이때 ‘정치’란 토론을 통해 상대를 설득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영역을 뜻한다. 사회적 문제를 두고 열리는 공론장에서 과학이 활용될 여지는 많다. 그러나 전치형 교수는 “우리 사회는 과학이 내놓은 결과의 기대 효과나 노벨상과 같은 성과만 논의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공론장 속 과학’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과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존 관념을 전환해야 한다. 전 교수는 과학이나 공학은 우리 사회와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일반 시민은 물론 과학자도 과학 혹은 공학을 정치 또는 사회와 분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며 “과학이 모든 문제를 척척 해결해주는 ‘해결사’가 아닌 시민들의 정치적 의식, 도덕적 감수성을 형성하는 ‘교양’으로 인식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율주행차가 그 예다. 우리는 더욱 똑똑해진 자율주행차 알고리즘을 통해 교통안전 문제 일부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기술이 교통안전을 전부 보장하지는 못한다. 자율주행 알고리즘은 이미 존재하는 교통 환경 안에서 제한된 효과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치형 교수는 “완전한 안전 보장을 위해서는 결국 운전자 직업 문제나 안전 문제와 같은 시스템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며 “개발자, 규제 당국자, 일반 시민 모두가 기술을 다룰 때 ‘기술 적용 전에 점검할 것은 없는가’와 같은 문제에 관해 얘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전이라는 가치는 개별 과학기술이 디자인, 제도, 법규, 관행 등 전체 시스템과 엮일 때 비로소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왜 과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전치형 교수는 작년에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외부 집필 위원으로서 보고서 작성 과정에 참여했다. 당시의 기억을 회고하며 전 교수는 “기존 상식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학계의 일”이라며 “그러나 세월호 참사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설명을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전 교수의 동료 김승섭 교수는 ‘세월호학(學)’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9·11 테러, 보스턴 마라톤 테러와 같은 대형 참사에 대해 전공을 막론한 공동 연구를 진행해 아픔을 조금이나마 치유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세월호학’은 선박을 복원하는 물리학, 고통을 기억하는 인류학,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정치학 등 다양한 이론과 방법을 수반한다. 전 교수는 “과학이 시민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을 내놨는지, 또 그런 역량을 갖췄는지에 대해 지금도 가끔 되묻는다”고 말했다.

오늘도 과학자는 실험실을 지키고, 사람들은 과학의 도움을 받아 삶을 지탱하고 있다. 전치형 교수는 “우리가 영화 비평을 하며 사회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듯 과학을 사회적 맥락에서 보는 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과학과 사회를 분리하지 않고 과학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가 말한 ‘새로운 과학’이 별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과학’ 그 자체가 될 날이 곧 오지 않을까.

사진: 유수진 기자 berry83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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