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다가온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0년 전 이맘때가 생각난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부고가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영선수 조오련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내게 가장 큰 충격이었던 것은 마이클 잭슨의 죽음이었다. 

열다섯 살 때, 우연히 마이클 잭슨이 “Heal the World”를 노래하는 영상을 봤다. 그때부터 그의 팬이 됐으니, 인생의 절반 정도를 그의 음악과 함께했다. 내가 당시 그에게 열광했던 이유에는 그의 노래나 춤, 무대나 뮤직비디오뿐만이 아니라 그가 노래한 나눔과 평화의 메시지도 있었다. 마이클 잭슨은 내 취향뿐만 아니라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도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마치 내 몸의 일부를 영영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난 6월 25일이면 매년 나만의 의식을 치러왔다. 어느 해에는 내가 유난히 좋아했던 92년 헝가리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댄저러스 투어 공연 실황 영상을 보기도 했고 또 어느 해에는 그의 장례식 녹화 영상을 찾아보기도 했다. 한 달 뒤면 그의 10주기다. 올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올해 1월 열린 선댄스 영화제에서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의혹을 다룬 다큐멘터리 〈리빙 네버랜드〉(Leaving Neverland)가 개봉했다. 영화는 마이클 잭슨에게 어린 시절 성폭력을 당했다는 두 남성의 이야기를 매우 진실하게 담아냈다…고 한다.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 이렇게 적는 수밖에 없다. 학기 일정을 쫓아가는 게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감상을 미뤘다. 잠시 여유가 났을 때도 이런저런 핑계로 보지 않았다. 대신 이 영화에 대한 리뷰는 틈틈이 찾아 읽었다. 많은 이들이 마이클 잭슨의 치밀한 그루밍 성폭력* 방식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한편, 적지 않은 수의 팬들은 고발자의 진실성과 순수성을 의심하거나 비난했다. 낯설지 않다. 부끄럽지만, 고등학생 시절의 나 역시 그랬다.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의혹은 이번에 처음 제기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글은 지난 2월 28일 「뉴욕 타임즈」에 실렸던 웨슬리 모리스의 비평이다. 그는 이 글에서 어린 시절 그에게 마이클 잭슨이 얼마나 경이롭고 감탄스러운 존재였는지, 마이클 잭슨의 무대가 자신을 얼마나 매료했는지, 그러나 〈리빙 네버랜드〉를 보고 난 후, 왜 그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치열하게 써 내려간다. 나는 이 아프고 아름다운 글을 읽으면서 불길한 직감이 스쳤다. 

무엇을 소비하고 무엇을 소비하지 않느냐가 한 가지 중요한 정치적 의사 표현으로 여겨지고 있다. 소비자운동과 시민윤리의 독특한 결합에 늘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소비와 정치가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것 같다. 나 역시 성폭력 2차 가해나 임신 직원 해고 같은 문제가 드러났던 기업들의 제품을 불매하고 있다. 그런데 나 혼자 있는 방에서 남몰래(?) 마이클 잭슨의 음반을 듣는 것이 곧 그를 공적으로 옹호하는 행위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른 질문들이 여전히 남는다. 내가 이전처럼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즐겁게 들을 수 있을까? ‘예술가와 예술은 분리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그가 대중음악사에 남긴 거대한 발자국을 찬양할 수 있을까? <리빙 네버랜드>에 대한 소식 이후,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미투 운동을 지켜보며 세상이 변했고 내가 변한 탓이다.

이번 6월 25일, 꼭 열 번째가 된 그의 기일에는 <리빙 네버랜드>를 봐야겠다. 어쩌면 술에 취해 하룻밤을 꼬박 엉엉 울고,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그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루밍 성폭력 : 친분을 활용해 심리적으로 지배한 후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

 

신중휘 간사

삽화: 송채은 기자 panma200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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