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은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라고 적었다. 삶 가운데 팔 할을 바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바람은 곧 공기이니, 잠수나 죽은 척을 하느라 숨을 멈췄던 시간이 살아온 시간 중 이 할쯤 될 만큼 폐활량이 크다는 것이 첫 번째 의미가 될 것이다. 무에 바람 들 듯 바람은 드는 것이니, 피부나 허파가 푸석푸석하다는 것이 두 번째 의미이다. 바람은 맞기도 하는 것이니, 사모하던 여인들이 매번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나 꿋꿋하게 버텨냈다는 자부심이 담긴 말이라고도 할 것이다. 바람은 나고 피우는 것이니, 대략 열 시간 중 여덟 시간쯤은 조강지처가 아닌 사람과 보냈다는 은밀한 고백도 엿볼 수 있으리라. 또한 불어오는 바람은 날리고 부수는 것이니, 잦은 태풍으로 터전을 잃은 이재민의 눈물 몇 방울과 불굴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팔 할을 바람으로 사는 것이 어디 미당과 이재민뿐이겠는가? 우리 또한 바람의 자식들이다. 학교에는 치맛바람이 불고, 유흥가의 뒷골목과 무도회장에서는 ‘삐끼’들이 바람을 잡는다. 연예계에서는 이바람, 김바람, 박바람이 여인들을 울리고, 뻣뻣한 사지를 엿가락처럼 녹일 것을 강요하는 춤바람도 갈수록 거세진다. 에어컨 바람으로 도시는 냉방병에 빠졌고, 신도시가 들어설 곳에는 투기 바람이 분다. 피씨방에서는 포트리스에 심취한 젊은이들이 바람의 세기를 가늠하느라 바람 머리를 쥐어짠다. 가지 많은 나무에만 불던 바람은, 이제 가지 드문 나무에도 불어 ‘바람난 가족’을 만들어낸다. 선거철도 머지않았으니, 바람을 타고 여의도까지 날아가려는 정치인도 숱하게 늘어날 것이다. 아마도 먼 미래의 역사가는 우리 시대를 ‘바람 든 사회’, ‘바람난 시대’로 기록할 것이다.


바람은 왜 일어나는가? 우리 사회에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물질’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바람이다. 숨통을 조여 오는 경쟁사회에서 남들보다 처지지 않거나 남들을 앞서려는 바람, 정치적 억압 속에서 억눌러야 했던 민주적이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바람, 봉건적 속박 속에서 드러내지 못했던 양성 평등한 사회에 대한 바람. 이제서야 터져 나오는 그 모든 바람·욕망과 현실의 기압차로 인해 바람이 분다. 그러므로 현실의 수위가 욕망의 높이에 다다르지 않는 한, 우리는 좀 더 오랜 시간 바람에 휘둘리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 부는 바람은 다가올 싹쓸바람을 알리는 산들바람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마냥 걱정할 일만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매우 오래 전부터 불었으면서도 항상 새로운 바람인 신바람이 있다. 어깨에서 부는 이 바람은 현실을 바꾸는 유익한 바람이다. 가히 모든 바람을 잠재우는 바람 중의 바람이요, 바람 아닌 바람이자, 바람·욕망 자체인 이 바람이야말로 우리를 키운 팔 할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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