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학과 조민지 강사
국사학과 조민지 강사

 

대학신문으로부터 칼럼 제의를 받고, 학생들 혹은 후배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될지 생각해봤다. 그러다가 많은 학생이 대학에 입학한 후 강도는 다르더라도 일정 수준의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동안 세상의 중심은 나, 바로 이 내가 대학 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야말로 우주가 돌아가는 궁극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좋은 성과를 낸 사람들끼리만 모여 있는 집단에 진입해 버린 것이다. 그동안 나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주던 성과들은 그만 무색무취가 돼버리고 나는 무대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도대체 이 비극적인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이것은 나만 따라오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침이 아니며, 확신에 찬 조언 정도도 못 된다. 그냥 남들은 어떤지 인터넷에 검색해볼 때 뜨는 후기 정도로 여겨주면 좋겠다.

그래서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내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닌 순간이 왔다. 물론 비극적이겠으나, 지금 왔다면 상대적으로 늦게 온 것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획일적인 교육기준과 맞지 않았던 많은 친구들이 이미 오래전에 무대의 주변으로 밀려나는 경험을 겪은 바 있다. 운 좋게 이런 순간을 계속 모면해가는 사람들의 우주는 평생 자기 자신만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오히려 위험천만한 일이다. 우리는 늦었더라도 일단 이 감정을 겪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그렇지만 우선 당황스럽고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럴 때 떠올리면 좋은 것은 우리가 일단 화학적, 생물학적 자극에 반응하는 유기체라는 점이다. 우리 자신에게 적정 수준의 자극을 제공해보자. 밥을 챙겨먹자. 지금 심정으로는 무엇을 해봤자 나아지지 않을 것만 같지만, 높은 확률로 나아진다.

어떻게든 동물로서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내가 사실 우주의 먼지일 뿐이라는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중심으로만 살아왔기 때문에 먼지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내가 그동안 나 자신의 소우주에서 먼지로 취급했던 주변 사람의 삶에 눈을 돌려, 다른 먼지들은 도대체 어쩌고 있는지 관찰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먼지 대 먼지의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돼야 하고, 주변 사람들의 삶은 나의 소우주를 구성하는 먼지로만 취급한다면 새로운 자극을 얻기 힘든 것이 당연하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는 나,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나, 아무리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탐닉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오로지 나 자신만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면, 절대로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을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나의 전공인 한국 현대사는,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다른 먼지들의 삶을 관찰하기에 나름대로 좋은 방법이었다. 그렇게 멀지 않은 시공간 속에서 피고 지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내가 그동안 부차적으로 취급해왔던 다른 사람들의 삶 역시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소우주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의 우주가 소멸하는 것이다. 나의 세계가 모든 세계의 중심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이 중심인 단 하나의 세계, 나의 소멸로 사라질 하나의 우주를 갖고 있다. 소멸하지만 않도록 스스로를 아끼자. 그것 외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든, 기말고사가 망하든 쓰레기처럼 방황하든, 나의 세계는 나로 인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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