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호(의학과 교수)

유성호 교수(의학과)
유성호 교수(의학과)

정들었던 교정을 떠나는 학생에게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원래 이런 글은 연륜이 풍부한 명예교수님이나 사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 분들이 쓰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지극히도 범상한 제게 이런 의뢰가 들어와서 한동안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고민에는 관악을 떠나는 여러분 각자의 상황이 모두 다르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학부를 졸업해도 대학원에 진학하는 분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낯선 사회로 나가게 될 수도 있고 자신을 위한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분도 있겠지요. 이렇게 다양한 길 앞에 서 있는 여러분들의 그 복잡한 심경을 잘 알지도 못하고,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제 글을 여러분만큼 아니 여러분보다 발랄했던 X세대의 어떤 선배가 아직 꼰대가 되기 전(?)에 하는 마음속 회포를 푸는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누가 처음 이 말을 했는지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해석한다면 “과거를 잊은 국가에 미래는 없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이 말은 거시적으로는 역사를 잊지 말고 이를 교훈 삼아 미래를 향해 나가는 발판을 마련하자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는 많은 분이 이를 개인에게 적용해 과거의 실수나 성공을 곱씹어보면서 미래를 향한 동력으로 활용하자는 내용으로도 변주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과거를 잊는 그대가 되기를”이라고. 

남자들은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을 한 번은 꾼다고 합니다. 저는 다행히도 그런 꿈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오히려 대학을 입학하고 얼마 동안 ‘사실은 대학 합격이 취소됐다’는 악몽을 여러 번 꿨습니다. 제가 왜 그런 꿈을 꿨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름 힘들었던 수험생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렇듯 모든 사람은 과거의 힘들었던 상황에서 받는 상처를 잊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학생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만의 어려운 과거와 이어진 현실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다른 학생들이 누리는 것들을 못 하는 서글픈 처지가 있으며, 화려했던 고등학교 학창 시절과 비교가 되는 현재 공부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때로는 가족과 친구와의 인간관계로 마음을 다치고 아파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족과 친구에게 어떤 상처를 받았든, 학교에서 내가 어떤 성적을 받았든, 주변 사람이 나를 어떤 식으로 힘들게 했든, 그 기억을 마냥 곱씹고 반추해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지치게 합니다. 많은 사람이 과거의 실패 또는 성공을 애써 기억하고 집착해 이를 미래의 방향타로 삼으려고 합니다. 때때로 ‘자존감’이라는 말에 공감하며 과거의 경험이 나의 자존감에 밀접한 관련이 있어 현재의 행복이나 불행이 이에 좌우된다고 믿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가 나의 미래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면 굳이 이를 애써 기억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니 저는 과감하게 관악을 떠나는 분들에게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과거가 화려하든 초라하든 잊고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십시오. 과거를 잊는 것은 단지 정신 건강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과거를 잊음으로써 여러분은 현재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보다 더 과감하게 더 적극적으로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상실을 새로운 현실과 미래를 획득해 극복할 수 있다면 이 또한 값있는 일이 아닐까요? 새로운 나를 위해 하버드 대학교를 중퇴한 빌 게이츠나 어려웠던 과거를 딛고 성공한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는 모순적이며 예측 불가능합니다. 과거에 얽매여 명분과 자존감을 찾기에는 우리의 환경은 너무 복잡하고, 유한한 삶은 찰나와 같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서울대학교라는 화양연화(花樣年華)는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일생에서 관악에서 공부했다는 과거가 평생의 유일한 성취가 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거의 ‘나’는 그러한 환경에서 아마도 최선을 다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 다르고 미래의 ‘나’는 과거와 현재의 ‘나’와는 또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믿고 현실에 충실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내가 돼야 합니다.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는 졸업식을 가리킬 때 ‘graduation ceremony’라는 용어 대신 ‘commencement’를 사용합니다. 이는 졸업(卒業)의 글자 그대로 마친다는 뜻보다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함의를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는 새로운 시작이 놓여 있습니다. 조금은 우울했을 수도 아니면 화려했을 수도 있었던 서울대학교 학생으로서의 어제를 관악에 남겨두고 떠나가십시오. 여러분은 과거를 잊고 미래를 향하는 새로운 ‘나’로서 정체성을 갖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졸업 아니 새로운 시작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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