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수 교수(서양사학과)

인문대(14동)에 위치한 최갑수 교수(서양사학과)의 연구실은 떠날 준비가 한창인 듯 미처 꾸리지 못한 짐으로 가득했다. 특히 민주주의와 관련한 수많은 책은 활발한 사회 운동가로서 최 교수의 모습을 짐작하게 했다. 1983년에 서울대에 부임한 그는 “학교를 떠나는 것이 아직 실감이 안 난다”라며 퇴임 소감을 밝혔다. 

Q. 학생으로서, 그리고 교수로서 서울대에 있으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A. 나는 관악 캠퍼스의 첫 졸업생이다. 황량한 관악 캠퍼스에 처음 온 1975년은 박정희 독재가 가장 극에 달했던 해였다. 그 해에 김상민 열사의 할복 자살이 도화선이 된 ‘5·22 시위’를 동기들과 함께 주도했던 것이 가장 잊기 어려운 사건이다. 

교수가 되고 나서는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의 사망 후 교수 동조 시위에 참여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교수들은 시위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워 연구실의 불을 껐다가 한 시간 뒤에 다시 켜는 항의 퍼포먼스를 했다. 그 외에 학생들과 함께 했던 서울대 법인화 반대 운동도 인상에 깊이 남는다. 

Q. 서양사 중에서 특히 프랑스사를 공부하게 된 계기와 프랑스사에서 배울 점은?

A. 처음부터 프랑스사를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대신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의 특정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주제는 결과적으로 ‘자유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맞닿아있었다. 그래서 교수가 된 이후에는 프랑스 혁명과 근대 국가 형성 문제에 천착하며 프랑스사를 공부하게 됐다. 

프랑스사는 크게 3가지 점에서 매력이 있다. 국가 형성 과정의 전형적인 경로를 보여준다는 점, 프랑스 혁명 등 근대 세계에서 인간 해방의 적극적 계기가 됐다는 점, 마지막으로 정치적 근대성의 경로 중 하나인 민주공화국의 경로를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래서 프랑스사는 우리 사회를 비추는 중요한 거울 역할을 한다. 특히 균형 잡힌 공동체성은 우리 사회가 프랑스사에서 배워야 하는 가치다. 

Q. 마지막으로 서울대에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서울대는 이제 단순한 학문 공동체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접점을 만드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서울대는 사회와 호흡하는 능력이 약하다. 또한 내부적으로도 그리 민주적이지 않은데, 법인화 이후로 불안한 구조가 더욱 강화됐기 때문이다. 즉, 조직 내부의 공감 능력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민주적 소통 구조가 약하면 자기 개혁을 하지 못하는 조직이 될 수 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뒤처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현재 서울대는 당면한 문제에 대해 내부적으로 합의해 답을 내놓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내부적 소통을 위한 장치를 잘 정비해야 할 것이다. 서울대가 문제의식을 갖고 강한 자기 개혁 의지를 가져야 함을 힘줘 당부하고 싶다. 

마지막 당부를 남기는 최갑수 교수의 얼굴에는 진심어린 걱정과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학자로서, 선생으로서, 그리고 사회 운동가로서 모두가 함께 호흡하는 사회를 꿈꿨던 그의 삶이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사진: 박소윤 기자 evepark0044@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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