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부양수연 기자
학술부
양수연 기자

때때로 사람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간절하게 희구한다. 꿈이든, 희망이든, 사람이든,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몹시 절박하게 느껴지는 그 무언가를 말이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내 마음이 지어낸 환상이었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나는 계속 쪼그라들었다. 대부분의 의도는 나에게 있고, 세계는 그저 흘러갈 뿐이었다. 그래도 계속 풍선을 불기는 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긴장이 풀리고 헛바람을 뱉어내겠지만, 그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문득, 무엇이 나에게 풍선을 불 수 있도록 힘을 준 것인지 궁금해졌다. 나의 사고와 감정은 무엇에 의해 추동되는가? 나는 왜 새로운 가설을 세우면서 내일을 기대하는 것일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 답은 나를 둘러싼 환경과 구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가깝게는, 교육이 아닐까. 푸코는 근대교육의 학교제도를 지적하며 사회 권력의 모순점을 파헤쳤더랬다. 교육이 사람을, 사회를, 그리고 역사를 어떻게 뒤바꿔 놓을 수 있었던 것인지 알고 싶었다. 각자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추구했던 서로 다른 가치들은 어떻게 당대의 보편적 관념으로 구조화됐던 것일까.

그런 와중에 우연히 한국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는 소식을 듣고 기획 기사를 꾸리게 됐다. 한국 서원은 교육기관, 제향공간, 정치기구까지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다. 교육을 큰 틀에서 개인에 대한 사회의 규율 방식으로 읽는다면 조선 중기 사회의 전환점을 보여주는 서원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가치를 정렬해갔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서원은 토론과 고전 강학을 통해 자유로운 성리학 공부를 지향한 기관이었다. 사대부들은 관학제도의 경직성과 학문을 대하는 세속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서원에서 성리학 이념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자 했다. 이런 점이 제도권 교육에 대한 반발인 동시에 서원의 실천적 성격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종종 서원은 붕당의 근거지면서 전근대적 신분제도와 사회 위계질서를 지탱해온 적폐로 지적되곤 하는데, 이런 비판의 요지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 서원이 소모적인 논쟁을 과열시킨 것은 사실이며 오늘날의 사회에 성리학의 틀이 맞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과거의 틀을 틀 자체로 매도하는 것이 옳은가? 시대적인 상대성 때문에 어느 한 사회를 전적으로 부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떤 보편성을 소거하는 태도가 아닌가? 서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성리학 사회가 철학적인 깊이를 구축하며 역동적인 사회로 나아가게 된 계기가 됐다. 이는 자유롭고 정직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며 사회를 교화하자는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전부 다 상대적일 뿐이라며 나는 풍선 부는 놀이를 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과연 우리가 틀 밖에서 어떤 사고를 할 수 있었던가? 틀 안에서, 혹은 경계선에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조선은 성리학이라는 틀 안에 머물렀고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틀 안에서 살아간다. 틀을 뒤엎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척자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보편적으로 추구돼야 할 이념을 우리의 틀 안에서 고민하는 노력은 할 수 있다. 그런 정도의 보편이라면, 우리 모두의 마음이 지어내는 환상이라는 점에서 바람이 빠지지 않는 ‘지속가능한 풍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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