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구소 구리나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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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에 다녔을 때, 우리 학교에는 옷차림뿐만 아니라 언행에서도 언제나 파격을 일삼는 도덕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도덕 교과서의 내용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에게 남녀차별을 받았던 사례를 말해보라고 하셨다. 친구들은 선생님의 격려와 응원에 힘입어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퉈 여성으로서의 서러운 삶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식상한 하소연, 선생님의 편파적 호전성에 슬슬 짜증이 나던 나는 그만 사춘기 아이들에게 강림한다는 ‘그분’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나는(또는 ‘그분’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이 사용하는 남녀차별이라는 용어에 이미 남녀차별이 반영돼 있습니다. 여자는 언제나 남자 다음에 언급돼야 한다는 생각이 ‘여남차별’이 아니라 ‘남녀차별’이라는 말을 낳은 것 아닙니까?” 말을 해 놓고 스스로 놀란 나는 선생님의 기색을 살피며 ‘파격’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내게 보이는 것은 응징의 그림자뿐이었다. 

그 날은 중학교 졸업을 앞둔 마지막 도덕 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수업이 끝나기 전 내 자리로 오시더니 대뜸 “너는 공부 왜 하니?”라고 물으셨다. 정말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돈 많이 벌려고? 효도하려고? 원하는 직업을 가지려고?” 선생님의 의도가 전혀 감지되지 않아 뭐라고 대답도 못 한 채 있으려니 선생님은 마치 재판의 최종선고를 내리는 판사처럼 엄숙히 말씀했다. “너는 일제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일본 앞잡이였겠구나.” 누군가가 나 대신에 짧은 비명을 질러주었다. 선생님은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일본 앞잡이라고 몰아세우시더니 교실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한동안 수치심과 분노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안 그래도 우울하고 예민한 사춘기 소녀에게 선생님의 응징은 파격을 넘어 너무 잔인했다.

내가 선생님의 응징을 이성적으로 차분히 생각해보게 된 것은 그 후로 한참이 지나서다. 나는 어쩌다 어른이 됐고, 또 어쩌다 ‘긴 가방끈’을 달게 됐다. ‘긴 가방끈’은 어마어마한 기회비용을 요구하고, 또 기회비용은 달콤한 보상을 요구한다. 그 보상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지만, 일신의 안녕과 명예보다 더 달콤한 것이 있을까? 만약 내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공부라는 어렵고 힘든 일을 감내해온 것이라면 잠깐의 굴욕과 모욕을 견딤으로써 평생의 안위를 얻고자 한 일본 앞잡이와 다를 바 없다. 공부 잘해서 ‘나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내 안의 일본 앞잡이와 손을 잡는 것이다. ‘일본 앞잡이’라는 선생님의 모욕은 억울함이 아니라 적나라함에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그러나 내가 공부하는 이유가 반드시 ‘일본 앞잡이’와 손잡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독립운동가도 공부를 해야 하며, 더 정확하게는, 공부가 그들을 독립운동가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 앞잡이의 공부와 독립운동가의 공부는 따로 있는가? 아니면 양자는 공부의 내용에 따라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공부내용에 대한 상이한 태도로 구분되는 것인가? 도대체 공부를 어떻게 해야 사익을 쫓는 일본 앞잡이가 아니라 대의를 추구하는 독립운동가가 되는 것인가? 

선생님이 남겨주신 ‘화두’는 교육학의 ‘긴 가방끈’으로도 쉽게 대답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단서조차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선생님이 ‘여남차별’이라는 말에 화가 났고 그에 따라 잔인한 응징을 내린다는 나의 알량한 짐작은 상처 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을 향한 분노를 나 자신에게 돌렸을 때 비로소 ‘공부를 왜 하니’라는 질문은 나에게 와 의미를 갖게 됐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내 안에 들어앉은 ‘일본 앞잡이’뿐만 아니라 내가 퍼부을 저주까지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파격적인 가르침을 안겨 주신 것이 아닌가 싶다. 가르침을 응징으로, 감사의 대상을 저주의 대상으로,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공부를 일본 앞잡이의 공부로 오인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 중 가장 고약한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소녀가 아닌 지금, 이제는 선생님께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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