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정신으로 지어낸 공간, 한국서원의 문화를 돌아보다
성리학의 정신으로 지어낸 공간, 한국서원의 문화를 돌아보다
  • 양수연 기자
  • 승인 2019.09.01 08: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날 유교문화를 동시대 흐름에 뒤쳐진 과거의 관습으로만 회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반도의 중세시기를 지배한 봉건적 질서인 유교는 전근대적 모순을 합리화하는 정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 500년을 견인해 온 성리학 이념과 사회상을 단순히 ‘지나온 것’으로만 여긴다면 곤란하다. 이전의 모순을 딛고 새로운 이상을 건설하려 노력했던 흔적을 통해 과거로부터의 시간이 어떻게 오늘날에 이르게 됐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9곳의 한국서원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서원은 16세기 이후 조선 성리학이 철학적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에서 사림 주도로 건립된 사학기관이다. 도학(道學)과 존현(尊賢)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의 성리학문화가 꽃피어난 바탕이 바로 서원이다. 지역사회와 활발히 교류하며 정치문화 형성에 기여한 서원은 향촌을 교화하고 사회적 공론을 모으는 기능도 수행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서원은 오늘날까지도 향사와 전통 예식을 이어오며 각각의 특색을 보존하고 있다. 『대학신문』은 서원이 수행해온 역할을 세 가지로 엮어 한국의 서원문화가 지닌 고유한 가치를 조명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살펴봤다.

 

성리학의 도통을 이어 강명도학(講明道學)하라

흔히 서원이 사학(私學)이기 때문에 국가운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립교육기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초기 서원의 모습은 그와 사뭇 달랐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1534년 풍기군수로 재직했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다. 주세붕은 송나라 주희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떠 고려 말 성리학을 전래한 안향을 기리는 백운동서원을 건립했다. 정순우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는 “송대 서원은 관학의 제도와 사학의 이상이 절충된 ‘관사합판(官私合辦)’의 형식을 갖췄다”라며 “주세붕은 이를 본받아 국가 운영에 적합한 교학체제를 부흥시키고자 했다”라고 설명했다. 초기 서원의 확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액* 역시 서원이 국가의 승인과 지원을 바탕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운동서원은 이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청원으로 1550년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이 됐다. 이황은 관직에서 내려온 뒤에도 서원이 조선의 사정에 맞게 정체성을 확립하며 널리 보급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가 제정한 「이산원규(伊山院規)」는 서원 내규의 표준이 됐다. 이후 사림이 주도적으로 지방 곳곳에 서원을 세워나가고 사액을 받으며 서원문화가 번성했다.

당시 향교라는 공립교육기관이 군현마다 하나씩 자리해 있어 지방에서도 관학체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원은 관과 사림파 문인의 호응을 얻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이는 서원이 당시 조선사회에서 필요로 하던 새로운 교육의 형태를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현순 HK교수(규장각한국학연구원)는 “과거시험 준비에 치중한 관학교육을 넘어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마하려 한 사대부들이 서원제도를 통해 학문적 욕구를 실현했다”라고 풀이했다. 이런 흐름은 16세기를 전후해 유교국가로서 조선조가 운영된 지 100년이 흐르며 점차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된 데서 시작됐다. 정순우 교수는 “서원은 당시 성리학적 이념에 적합한 교학체제를 모색하던 여러 주체의 이해관계가 합심해 나타난 결과”라고 분석했다.

서원은 조선사회에 자리잡는 과정에서 발흥지인 중국과는 다른 특성을 드러냈다. 중국서원의 경우 대체로 교육의 성격이 관학제도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정순우 교수는 “중국서원은 사학으로 등장했지만 관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운영되며 관학을 보조하는 체제로 편입되는 양상을 보였다”라고 설명했다. 그 때문에 중국서원에서는 교육제도와 사상의 유행에 따라 공부하는 과목이 달라져 양명학, 고증학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반면 한국서원은 성리학을 연마하던 자율적인 체제를 일관되게 지속해 온 기관이었다. 존현(尊賢)의 기반과 어우러진 이런 특성은 초기 서원의 보급을 주도한 이황의 서원론에 기반해 한국서원의 표준적인 형태로 자리잡았다. 이황의 서원론에는 학문을 출세의 수단으로 여기는 세태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선비상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정순우 교수는 “이황은 스스로의 선한 본성을 밝히는 데 학문의 근본이 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며 이를 수련하는 공간으로서 서원을 구상했다”라고 강조했다. 

서원에서는 자율적인 공부와 강독, 상호토론을 바탕으로 학문연구가 이뤄졌다. 박현순 HK교수는 “입학은 있지만 졸업은 없는 서원에서는 15~70세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원생들이 함께 성리학을 연마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심경』, 『근사록』 등의 성리학 서적을 강독하고 토론하는 강회(講會)를 갖거나 글짓기 경쟁인 거접(居接)을 통해 겨루며 자유로운 학문활동을 이어나갔다. 도산서원은 이와 같은 성리학 연구 기능이 활발했던 대표적인 서원이다. 도산서원 이동구 별유사*는 “도산서원의 옛 강학기록에는 연초에 과제를 주고 연말에 모여 탐구내용을 발표하며 평가한 흔적이 남아있다”라고 소개했다. 이는 출판과 서적보관 등 서원의 도서관 기능 강화로 연결되기도 했다. 박현순 HK교수는 “서원의 바탕은 경직된 체제나 정규교육과정이 아니다”라며 “자발적인 학문공동체로 꾸려져 다양한 학술문화를 형성해 갔다는 점이 서원의 중요한 의의”라고 짚었다. 

유생들은 병산서원 입교당에서 자신의 욕망을 이기고 선한 본성을 지켜내기 위한 공부를 했다. 
유생들은 병산서원 입교당에서 자신의 욕망을 이기고 선한 본성을 지켜내기 위한 공부를 했다. 
병산서원 만대루는 아름다운 주변 산수와 어우러져 자연과 인간이 맺는 조화로운 관계를 체화할 수 있는 유식공간을 형성했다.
병산서원 만대루는 아름다운 주변 산수와 어우러져 자연과 인간이 맺는 조화로운 관계를 체화할 수 있는 유식공간을 형성했다.

서원이 지향한 정신은 서원의 공간구성과 건축입지에도 오롯이 반영돼있다. 이상해 명예교수(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는 “서원에는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수양하는 장수(藏修)의 공간이 구현돼있다”라고 말했다. 서원의 강학공간은 강의와 토론이 이뤄지는 중심건물인 강당과 유생들이 기숙하는 동·서재의 재사(齋舍)로 구성된다. 때때로 유생들은 학문하는 긴장에서 벗어나 유식(遊食)공간에 해당하는 누(樓)에 올라 자연을 완상하며 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런 공간구성은 서원이 위치한 지역의 자연환경과 어우러진다. 이 교수는 “번잡한 도회지에서 떨어져 한적하고 산수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자리한 서원의 입지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전인교육이 이뤄지기 적합했다”라고 설명했다. 병산과 낙동강이 마주보는 산자락에 입지한 병산서원 만대루(晩對樓)는 입교당(立敎堂)과 함께 외부환경에 열린 공간을 형성해 인문건축과 자연의 탁월한 조응을 보여주고 있다.

 

선현에 대한 예(禮)의 정신을 보존하고 규범화한 공간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세워진 서원과 다른 한국서원의 특수한 성격은 존현의 전통이 서원문화에 깊숙이 자리잡은 데서 발생한다. 이는 서원에서 사우(祠宇)를 세워 선현을 배향하는 제향기능을 수행한 바와 밀접하게 관련돼있다. 박현순 HK교수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향교와 성균관에 문묘를 두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선현에 존경을 표하고 신성성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배향인물이 고정돼있던 국립교육기관과는 달리 서원은 각기 다른 선현의 위패를 모셨다. 박 교수는 “서원은 사표로 삼는 스승의 연고지에 세워졌다”라며 “유생들은 선현의 학덕과 행의를 추모하고 그 유풍을 본받아 학문하려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특정 인물에 대한 제향의 필요성은 교육적 목적과 함께 서원 건립의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세워진 서원과 다른 한국서원의 특수한 성격은 존현의 전통이 서원문화에 깊숙이 자리잡은 데서 발생한다. 이는 서원에서 사우(祠宇)를 세워 선현을 배향하는 제향기능을 수행한 바와 밀접하게 관련돼있다. 박현순 HK교수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향교와 성균관에 문묘를 두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선현에 존경을 표하고 신성성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배향인물이 고정돼있던 국립교육기관과는 달리 서원은 각기 다른 선현의 위패를 모셨다. 박 교수는 “서원은 사표로 삼는 스승의 연고지에 세워졌다”라며 “유생들은 선현의 학덕과 행의를 추모하고 그 유풍을 본받아 학문하려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특정 인물에 대한 제향의 필요성은 교육적 목적과 함께 서원 건립의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유생들은 사우에 출입할 시 내삼문의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와야 했다. 사진은 돈암서원의 내삼문이다.
유생들은 사우에 출입할 시 내삼문의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와야 했다. 사진은 돈암서원의 내삼문이다.

선현을 존숭하는 정신이 예(禮)를 중시하는 문화로 나타나며 서원에서는 예식의 전통이 발달했다. 봄·가을마다 사우에서 지내는 향사(享祀)는 오늘날까지도 엄격한 예절에 맞춰 진행되고 있다. 이상해 교수는 “사우로 들어가는 입구인 내삼문(內三門)의 가운데 문은 평소 출입을 금하며 오직 선현의 위패를 품은 제주(祭主)만이 제향시 드나들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오른발부터 디뎌 왼발을 모은 다음에 한 계단을 올라가며 예를 다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향사는 단순히 제사 기능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제향에 참여한 선비들은 상읍례*를 행하며 서로 예우하고 친교를 다졌다. 정순우 교수는 “서원의 의례에는 사족 공동체 내부의 유대감을 결속하고 향풍을 바로잡으려는 노력 또한 배어있었다”라고 짚어냈다.

 

도동서원에는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서원 건축의 원리가 매우 잘 드러난다. 그림은 도동서원의 지형단면도.
도동서원에는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서원 건축의 원리가 매우 잘 드러난다. 그림은 도동서원의 지형단면도.

 

도동서원의 정경.
도동서원의 정경. 사진 제공: 이상해 교수
사계 김장생이 『가례집람』에서 제시한 예제건축의 규격은 돈암서원 응도당의 처마 모양과 기둥 개수 등에 반영됐다.사진 제공: 이상해 교수
사계 김장생이 『가례집람』에서 제시한 예제건축의 규격은 돈암서원 응도당의 처마 모양과 기둥 개수 등에 반영됐다.

예를 규범화한 공간으로서의 특징은 서원의 건물배치와 예제건축(禮制建築)에서도 드러난다. 서원은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경사지 위에 세워졌다. 지대가 낮은 곳에는 유식공간과 강학공간이, 높은 곳에는 제향공간이 위치한다. 이상해 교수는 “유식, 강학, 제향공간 사이에 높낮이차를 둠으로써 성격이 다른 공간들에 위계를 부여했다”라며 “내삼문을 통해 제향공간을 안쪽에 분리해둔 것은 유생들의 출입을 제한해 항상 존엄하고 정밀한 느낌을 갖도록 한 설계”라고 설명했다. 지형단면도와 전경에서 드러나는 도동서원의 건축은 중심축을 경계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세 공간의 위계를 잘 구현한 사례다. 또한 서원의 건축물 각각은 제사와 상읍례 등의 의식에서 예절을 행하려는 목적이 반영된 예제건축에 속한다. 사계 김장생을 비롯해 조선 예학을 부흥시킨 성리학자들을 배향하는 돈암서원에는 그런 형식을 잘 구축한 응도당(凝道堂)이 남아있다. 논산시청 관광체육과 이재철 해설사는 “응도당은 예학을 집대성한 김장생이 『가례집람』에서 제시한 건물의 평면형식과 구조를 반영해 일상에서 예를 실천할 수 있도록 했다”라고 설명했다. 

서원은 16~17세기 중반까지 도학과 존현을 바탕으로 건강한 문화적 전통을 형성해 왔지만 변화하는 사회질서 속에서 점차 폐단을 드러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원이 전국에 난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당쟁의 격화로 인해 서원의 제향기능이 변질됐던 양상과 관련이 있다. 박현순 HK교수는 “서원은 학통을 중심으로 지방에서 당파 세력을 규합하는 거점이 됐다”라고 설명했다. 정쟁에 희생된 같은 당파 인물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세우는 등 존현 기반의 제향 원칙이 점차 퇴색했다. 수십 개의 서원에서 동일인물을 배향하는 경우도 잦아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을 배향하던 사우가 44개에 달할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강학기능이 약화돼 사우 형태로만 운영되는 서원이 적지 않았다. 이에 붕당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탕평책을 추진하던 영조는 18세기 들어 전국적으로 173개의 서원과 사우를 허무는 강경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조선조의 사회변동과 흐름을 같이하다, 서원과 향촌사

서원의 성장은 사림 세력이 조선 중기 이후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지방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과정과 결부돼있다. 사림은 조선 전기에 정계를 장악한 훈구세력의 도덕성 타락을 비판하며 16세기를 전후해 성장했다. 박현순 HK교수는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이해가 깊어진 이들이 정치 세력으로 결집하며 서원을 통해 집단정체성을 강화했다”라고 강조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지방 향촌에서 사림의 영향력도 증대됐다. 정순우 교수는 “서원 발흥의 사회적 여건은 지방의 사족 지배층이 향촌 풍속을 교화하는 향약과 계조직 등을 확산시키려 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라고 풀이했다. 이처럼 서원문화는 조선조의 정치사회변동과 흐름을 같이하며 발달했다.

서원은 향촌사림이 벌이는 정치사회활동의 주 무대였다. 그 배경에는 유교국가 조선의 독특한 정치문화가 자리한다. 노관범 HK교수(규장각한국학연구원)는 “학파와 정파가 결합돼있는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의 중요한 정치사적 특징”이라며 “학맥이 길러지는 장(場)인 서원을 통해 공론을 형성함으로써 유림들은 중앙조정과 지방사회의 정치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서원에서 개최되는 향회에서는 정치적 현실을 논의하며 향론을 형성해 나갔다. 향촌사림은 지역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통문을 돌리며 공론을 모았고, 이를 바탕으로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노관범 HK교수는 “서원은 성리학의 권위를 바탕으로 공론의 핵심을 장악했던 조선조 정치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풀이했다. 또한 서원에서 지역민을 대상으로 보급한 향약은 사회교육의 역할을 수행했다. 사회적 관계를 규율하고 바람직한 덕목을 전파하는 향약은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며 사회질서를 이끌어갔다. 이처럼 서원은 성리학적 사회윤리를 전파하며 지역공동체를 이끄는 향촌자치기구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 말기에 활동한 화가 채용신이 1924년에 그린 무성서원의 모습이다.
조선 말기에 활동한 화가 채용신이 1924년에 그린 무성서원의 모습이다.

무성서원은 그와 같은 현실참여활동이 활발했던 대표적인 서원으로, 도회지에서 떨어진 곳에 입지한 일반 서원들과는 달리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해있다. 무성서원은 통일신라시기 마을 근방을 다스리는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푼 최치원을 배향한다. 정읍시청 관광개발과 김선정 해설사는 “무성서원은 규모도 작은 편이고 배향인물도 서원의 표준에 맞는 인물은 아니지만 향촌교화와 사회참여에 힘써온 흔적이 잘 남아있다”라고 소개했다. 무성서원은 을사늑약에 저항한 병오창의(1906)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는 사회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던 서원의 유생들이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실천한 사례다. 최익현과 임병찬 등의 지식인들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투필종융(投筆從戎)*했다. 무성서원 옆 마당에는 이들의 뜻을 국한문으로 새긴 병오창의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서원의 사회참여에 순기능만 있던 것은 아니다. 조선 말기 사회질서의 변동 속에서 서원의 향촌지배 방식도 변화를 겪었다. 18세기를 거치며 또 다시 서원이 난립했고 이때는 서원이 가문 결속의 근거지로 작동하는 문중서원화 경향이 두드러졌다. 문중서원은 동족촌 내부에서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열린 정치를 지향한 이전과는 달리 폐쇄적인 특성을 보였다. 노관범 HK교수는 “성리학 이념이 후퇴하고 성리학 사회가 세속화를 겪으며 공론정치 시스템이 무력화됐다”라며 “서원 역시 권세 있는 가문의 사회적인 자기보전 장치로 축소됐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현상은 조선조 통치체제 전반이 수명을 다해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가는 흐름의 일부였다. 많은 서원에서 공적인 가치가 부재해 그 본래 성격과 기능을 잃어갔으며 군역, 납세 등의 의무를 면제받는 특권이 악용돼 국가 재정이 악화되는 등 사회적 폐단도 잦았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의 폐단을 근절하기 위해 1871년까지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철폐했다. 이후 근현대사의 굴곡을 겪고 교육의 중심이 전통적인 성리학 강학에서 근대적 교육문화로 이행하며 서원은 이전과 같은 사회적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더욱이 오늘날의 사회운영원리와 교육방식은 성리학 이념과 다소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서원의 전통을 보존해 도학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노력은 곳곳에서 이어져왔다. 이들은 지역사회와 교류하며 서원문화의 발전적 측면을 계승하고 있다. 이동구 별유사는 “도산서원에서는 선비문화수련원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으며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성학십도』를 읽는 모임을 개설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9곳의 서원은 이런 노력들을 기반으로 세계유산으로서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한국서원은 도학, 존현, 사회참여 등 다양한 기능을 아우르며 조선조의 고유한 성리학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비록 조선 말기에 이르러 자폐적인 성격을 보이기도 했지만 서원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 당대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인문적 가치를 성숙시켰다. 현대사회는 국가이념이 학문과 사회의 이상을 규제하는 시대가 아니므로 오늘날 서원문화를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지속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새롭게 대두하는 사회적 모순점을 과거의 유산에 비춰보며 그 뜻을 헤아리고 참고할 수 있다. 한국의 서원문화가 지향한 주체적인 학문탐구와 예의 실천, 사회교화의 정신이 오늘날 더욱 발전적으로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사액: 임금이 서원이나 사당 등에 이름을 지어서 편액을 내리던 일.

*별유사: 서원에서 사무를 맡아보는 직책.

*상읍례: 팔꿈치를 구부려 가지런히 모은 손을 눈높이로 올리는 예절.

*투필종융: 붓을 던지고 전쟁터로 나아감.

 

사진: 박소윤 기자 evepark0044@snu.ac.kr, 양수연 기자

삽화: 송채은 기자 panma2000@snu.ac.kr 

레이아웃: 황지연 기자 ellie0519@snu.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