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준 편집장
신동준 편집장

누군가 내게 기사를 쓰는 이유를 묻는다면, 아마 나는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라 대답할 것이다. 편집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긴 부끄럽지만 나는 분명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하나 뿌듯하게 여겼던 것은 늘 최대한 다양한 취재원을 확보하려 노력했고,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신문사에 들어온 첫 학기 동안, 나는 노동조합 담당 기자였다. 정말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매주 월요일마다 학내 노동조합 사무실을 돌며 이번 주는 특별한 일 없냐고 물으며 기삿거리를 찾곤 했다. 그렇게 작년 2월 용역·파견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이 완료됐다는 기사부터 시작해서 한 학기 동안 다섯 개가 넘는 노조 관련 기사를 써냈다. 나름대로 학내 노동자들의 인권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의 입장을 잘 듣기 위해 취재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학기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노조 분들이 하시던 얘기는 늘 비슷했다. “복지 수준이라도 정규직 직원들과 비슷하게 맞춰달라” “근무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그와 관련해서 자료 정도는 검토해 봤던 기억이 난다. (『대학신문』 2018년 4월 9일 자)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런 수치가 실제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 본 적이 있었던가. 참으로 안일했다. 별일 없냐고 묻는 말 한마디로 그들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기자로서 가장 부끄러운 순간은 기사를 다 쓰고 나서 ‘아, 이건 더 취재해 볼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 때다. 결국은 취재 과정에서 충실하지 못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청소 노동자의 죽음을 접한 후 너무나 자괴감이 들었다. “근무 조건이 열악하다”라는 말을 듣고, 정말 얼마나 열악한지 왜 한 번도 내 눈으로 확인해 보려 하지 않았을까. 방학 내내 덥다고 에어컨을 틀었다 껐다 하면서도 그들이 어떻게 쉬고 있는지를 왜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아침에 신문사를 청소해주시는 고마운 분도 계시는데, 왜 자주 만나 뵙는 그분께조차 힘드시지 않냐는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않았을까.

현대 사회에서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분명 노력을 해야 하고,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많은데 너는 왜 관심을 가지지 않냐”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지 말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만 한다”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가치관이 다를 수 있고, 어떻게 보면 이런 말들 또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내 삶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삶 또한 존중받을 가치가 있기에 사회적 약자의, 사회에서 소외된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외된 목소리를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도 닿게 하고, 그들이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결국 언론의 역할이다. 그래서 이번 사건 이후에 더욱더 뼈저린 반성을 했던 것 같다. 이것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 내게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펜을 들었다고 말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나 역시 펜을 갈고 닦아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비록 내가 그리 큰 영향력을 가지는 기자가 아닐지라도, ‘기자’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취재에 후회를 남기지 말자고 다짐했다.

당연히 들었어야 할 이야기에 더 일찍 귀 기울이지 못해 죄송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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