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 대학신문
  • 승인 2019.09.0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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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전공학부 황운중
자유전공학부 황운중

신입생 때의 봄이었다. 엠티와 축제가 취소되고 추모와 시위가 빈자리에 들어찼다. 배가 뒤집히고 삼백여 명이 빠져나오지 못했다. 온 나라의 시선이 배 한 척에 집중돼 있었다. 정부는 배가 왜 뒤집혔느냐고 묻는 질문에 ‘복원력 상실’이라고 답했다. 2학년 때의 일이다.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고 경찰은 물대포로 늙은 농부에게 직사 살수를 했다. 서울대병원은 사인을 ‘심정지’라고 밝혔다. 시간이 흘러 올해의 일이다. 청소 노동자가 냉방이 되지 않는 좁디좁은 휴게실에서 죽었다. 학교 당국은 그가 ‘지병’으로 죽었다고 밝혔다.

신입생 때였다. 존경하는 한 교수는 철학 교양 수업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학에서 배워야 할 것은 오로지 사물과 현상, 사회의 본질을 직시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비단 철학과에게만 요구되는 잣대가 아니다. 모든 학문은 제각각의 도구를 사용해서 본질을 간파하려는 시도의 연쇄, 그 자체다.”

그 말을 품고 산다. 6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학 생활 동안 미약하지만 본질을 간파하려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여 나는 이런 추측에 각각 다다를 수 있었다. 배는 복원력 상실로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 복원력이 상실될 만큼 짐을 싣도록 눈감아 준 자들 때문에, 사람의 목숨보다 이윤이 숭앙 되는 사회 때문에 가라앉은 것이다. 늙은 농부는 심정지로 죽은 것이 아니라 국가가 독점한 폭력으로 죽었고, 국가가 폭력을 독점한다는 것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국가 때문에 죽은 것이다. 청소 노동자는 지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지병이 죽음으로까지 치닫게 된 열악한 환경 때문에 죽었고, 그러한 환경에 대해 잔인하리만치 둔감했던 우리 모두 때문에 죽은 것이다.

한편 최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을 곱씹어 본다. 조 후보자가 자격 미달이라는 주장의 뒷받침 근거로 ‘공정성 훼손’이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왜 아니겠는가? 조국 후보자의 해명을 들어봐야 한다는 주장, 그가 한 행위가 불법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고려하더라도, 그가 공정한 출발선에 서 있지 않았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런데 왜일까. 불공정하다는 말이 어쩐지 복원력 상실, 심정지, 지병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는 것은.

불공정은 불평등에서 기인한다. 불공정은 복원력 상실, 심정지, 지병처럼 관측하고 계량할 수 있지만 불평등은 관측할 수도 없고 계량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본질이다. 우리는 불공정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불평등에 대해 말해야 한다. 불공정은 다른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이다. 불평등을 굳이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다. 누가 다른 출발선에 서 있을 수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다른 출발선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을 눈감아 주는 자들은 누구이며, 우리는 그들과 무엇이 다른지, 도착 지점에 다다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직선으로 달려야 하는지, 사람들은 왜 달리다가 자꾸만 허망하게 죽는지... 본질을, 불평등을 말하다 보면 어김없이 눌변을 겪고 말줄임표로 문장을 맺었다. 망자들 앞에서 부끄럽고, 부족한 통찰력이 부끄럽고, 세계가 하염없이 슬퍼서 말을 잃었다. 존경하는 교수는 나의 눌변을 보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모든 아름다운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반드시 품고 있어야 한다고. 조 후보자에 대해 참으로 많은 말이 들리고 글이 보인다. 그 중에 눌변을 투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힘겹게 뱉은 것은 몇이나 될까.

나는 비단 총학생회뿐 아니라 모든 대학생이, 모든 인간이 눌변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모두가 자신의 울분만큼이나 타인의 울분을 직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울분의 무게를 달아 부등호를 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울분이므로 등호를 쳤으면 좋겠다. 나 역시 20대이므로 모든 친구들의 울분을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편법을 자행하는 기득권들의 현재완료형 나눠먹기 행태에 울분이 피어난다. 그러나 등호 없이 부등호만 거대한 울분들이 서글프다. 우리의 울분이 타인의 울분과 손잡을 수 있다면, 이 모든 일의 본질에—구조적 불평등에—닿을 수 있을 텐데. 타인의 울분이 우리의 울분과 진즉 손잡았다면, 그 청소 노동자는 무더운 여름에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지 않았을 텐데, 그랬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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