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자기파멸성을 감당할 용기
지혜의 자기파멸성을 감당할 용기
  • 대학신문
  • 승인 2019.09.0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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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연구원 김헌 HK교수
인문학연구원 김헌 HK교수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가 그곳에 가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는 누구인가?”라고 묻자, “소크라테스!”라는 대답이 나왔다. 소크라테스는 의아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어찌 가장 지혜롭단 말인가?’ 깊은 숙고 끝에 마침내 그는 그 뜻을 이해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뭔가를 안다고 믿는 반면, 난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으니, 바로 이것 때문이로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진리 탐구와 철학의 출발점이며 지혜의 핵심임을 깨닫고 다른 이들의 무지를 깨치게 하려고 일생을 바쳤다. 그 탓에 그는 미움을 샀고, 재판정에서 억울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빛나는 지혜는 치명적인 독배가 돼 그에게 돌아왔지만, 그는 독배를 거부하지 않았고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났다.

전설적인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어느 날 갑자기 닥친 흑사병의 재앙에서 백성을 구하려고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사람을 보냈다. “라이오스를 죽인 자가 테베에 숨어있다. 그 때문에 도시는 더렵혀졌고 신들이 노했다. 라이오스의 살인범을 찾아내 처벌하고 추방하라.”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내가 그 살인범을 찾아내 처형하겠다.” 사람들은 그를 믿고 안도했다.

테베의 왕이 되기 전,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의 왕자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서 끔찍한 신탁을 들었다.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 충격을 받은 오이디푸스는 결코 그렇게는 살 수 없다고 다짐했다. 왕자의 기득권을 모두 버린 채, 코린토스를 등지고 세상을 떠돌았다. 그 와중에 어떤 왕족의 무리와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어 폭행을 당했지만, 그들을 물리치고 살아남았다. 그 후에 테베 백성들을 잡아먹던 괴물 스핑크스와 맞닥뜨렸지만, 지혜와 용기로 괴물을 물리쳤다. 고결한 도덕적 결단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그는 테베의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고 때마침 비어있던 테베의 왕좌에 올라 전왕의 아름다운 미망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그런데 이제 수사가 진행될수록 오이디푸스는 점점 불길한 예감에 직면했다. 자신이 예전에 죽였던 그 왕족의 무리가 라이오스 왕과 그 수행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계속 수사를 진행하다가 자칫 그것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왕권을 유지하려면, 이쯤에서 수사를 마무리 짓고, 다른 대책을 세워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그 위험한 수사를 멈추지 않았다. 백성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으며,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어이 알아야겠다고 불타올랐다. 결국 그가 그렇게도 찾던 라이오스의 살인범은 다름 아닌 그 자신임이 밝혀졌다.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그가 죽인 라이오스가 바로 자신의 친아버지였고, 그가 결혼해 함께 살며 자식을 낳았던 이오카스테는 자신의 친어머니였던 것이다. 진실을 견디지 못한 이오카스테가 자살하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뽑았다.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현실의 처참함 때문이며, 동시에 더렵혀진 조국을 구하겠다는 약속의 결행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나의 말과 행동은 진정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가 진실의 깊은 곳에 이르러 거기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파멸의 위험성을 직면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옳다고 믿고 괜찮다고 용인했던 일들이 의도치 않게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린 것은 아닌지. 남을 향해 겨누던 비판의 칼날 앞에 내가 섰을 때, 나는 얼마나 당당하고 자유로운지. 소크라테스와 오이디푸스의 비장한 모습이 새삼 떠오르는 요즘, 다시 묻는다. 내가 누리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양보와 피맺힌 억울함에 빚진 것은 아닌지. 그 빚을 갚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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