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분노보다 강력한 기억
찰나의 분노보다 강력한 기억
  • 황예정 기자
  • 승인 2019.09.08 10: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뷰 | 영화 ‘김복동’으로 평화를 바라보다

몇 달째 계속되고 있는 한일 갈등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극심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이번 사태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여파를 몰고 오는 이유는 경제와 안보까지 번진 갈등의 진원지가 바로 역사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일본 식민지배 역사는 씻을 수 없는 모욕이자 분노의 원천이다. 분노라는 감정은 매우 강렬해서 짧은 순간에 많은 사람의 관심을 집중시킬 기회로 활용되기도 한다. 8월 광복절 즈음이면 영화관을 휩쓰는 ‘애국심 마케팅’도 이런 현상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난달 8일 개봉한 영화 〈김복동〉은 단순히 애국심에 호소하는 영화로 치부하기는 곤란한 영화다. 이는 그저 화를 불러일으키거나 정신 승리를 외치는 여타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영화 〈김복동〉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일대기를 담은 전기 영화다. 1926년에 태어난 그는 열여섯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일을 시켜준다는 일본군의 말에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이후 8년 동안 중국, 동남아 등지의 전쟁터를 따라 가축처럼 트럭에 실려 다니며 군인을 상대하는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 가까스로 귀향한 후에도 그는 따뜻한 정 나눌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아픔을 삭이며 억척스럽게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영화는 김복동 할머니를 단순히 ‘피해자’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강인한 투사, 세계적인 영향을 끼치는 여성 인권 운동가 김복동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앉아서 보호와 도움을 받기만을 간청하지 않고 일어나 직접 두 발로 뛰며 일본 정부와 국제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세계 각지에서 우리처럼 전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성들을 돕고 싶습니다.”

66세였던 1992년 정부에 위안부 피해 신고를 한 뒤로 김복동 할머니는 27년간 인권 운동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았다. 매주 수요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 90세를 넘긴 고령의 몸을 이끌고 유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세계 각지를 돌며 평화운동을 벌였다. 그는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전시 성범죄에 대한 관심과 해결을 촉구했다. 다시는 누구도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를,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 주기를 간절히 호소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 사실을 증언할 때마다 김복동 할머니는 매번 채 아물지 못한 끔찍한 기억을 헤집어 보여야 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병세도 악화됐다.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갔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힘줘 말했다.

“내가 살아생전에 내 힘으로 (일본 정부의 사과를) 못 나오게 하면 할 수 없지만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끝까지 싸우다 갈 거야.”

영화가 진행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꼿꼿하고 강한 모습을 보였던 김복동 할머니도 학생들을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부드러운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어린 학생을 보면 일본군에 끌려가기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한없이 자상해졌다. 그는 특히 일본 정부에게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재일조선학교’를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2016년 전 재산을 기부해 만든 ‘김복동 장학기금’으로 재일조선학교 학생 6명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복동 할머니가 학생과 어린이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던 이유는 ‘기억’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투쟁의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래 세대에게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알리고 기억하게 한다면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일본의 사죄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래서 한국 정부가 피해자의 동의 없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위한 합의에 서명했을 때도, 아베 일본 총리가 끝까지 자신의 입으로 사과하기를 거부했을 때도 그는 분노의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다만 담담하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기를, 그래서 우리가 이 숙제를 잊지 않고 해결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올해 1월 향년 94세를 일기로 눈을 감은 ‘평화 운동가’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는 일본을 향한 분노가 거세게 일고 있는 지금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찰나의 분노는 잠시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한때일 뿐 총체적인 해결을 끌어내기엔 부족하다. 오히려 차분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영화 〈김복동〉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영원히 기억하고 끝까지 싸워서 승리를 일궈내자고 말이다.

 

김복동

송원근 감독

2019. 8. 8.

12세 관람가

101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