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조선일보」, 「자유신문」, 「해방일보」, 「조선인민보」, 「독립신보」 … 대학원에 입학한 지 1년 반, 논문을 쓰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여러 신문 자료를 봤다. 가독성 떨어지는 세로쓰기에다 국한문 혼용체인 것도 모자라 인쇄 상태까지 불량한 옛 신문과 씨름하면서도 이 신문이란 것에 나름의 애증이 붙어가던 찰나였다. 그런 와중에 지도교수님이 나에게 신문사 일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넌지시 물었을 때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느덧 애증의 대상이 돼버린 신문의 세계에 약간이나마 발을 담가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직 배움이 미진해서 지도교수님이 어떤 연유로 나를 『대학신문』에 추천하셨는지 여전히 그 뜻을 짐작하기 난망하다. 다만 그 뜻을 미뤄보건대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갖는 영향력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직접 경험함으로써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보다 폭넓게 만들고자 하심이 아닌가 싶다. 현대사를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은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언론이 미친 역사적 파장에 대해서 여러 차례 지도교수님과 선배들로부터 배운 바 있다. 저 유명한 ‘동아일보 오보사건’이 해방 직후의 격렬한 좌우 대립을 낳았던 것을 비롯해 언론을 둘러싼 여러 파동이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점을 공부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지도교수님은 내가 신문사에서 직접 일함으로써 현대사에서 언론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이해하고 이를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바라신 것이 아닐까.

일을 시작하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처음으로 『대학신문』에 글을 쓰는 이 순간,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간사 일을 할지 여전히 고민스럽다. 더욱이 근 7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문이 아닌가. 기사를 직접 쓰는 것도 아닌데 무얼 그렇게 근심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많이 어리고 부족한 나에게는 중책으로 느껴진다. 

다행스럽게도 간사로 부임하자마자 바로 머릿속에 보고 배울 롤모델을 떠올렸다. 작년 말 나는 20세기 초에 살았던 한 칼럼니스트의 전집을 편찬하는 팀에서 일했다. 1908년생인 이 칼럼니스트는 약관의 나이로 「동아일보」 평양지국의 사회부 기자가 돼 여러 차례 신문과 잡지에 조선인들의 비참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르포를 연재하며 민중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를 위해 그는 탄광 깊숙이 들어가 광부들이 처한 현실을 그렸고, 압록강을 넘어 이주 조선인들의 삶을 기록했으며, 각종 소작쟁의를 쫓아다니면서 소작농의 목소리를 듣고자 애썼다. 조선 최초의 고공농성을 시도한 여성 노동자 강주룡(姜周龍)을 전국에 알린 사람도 그였다. 해방 이후 혼란한 정세 속에서 그는 수차례 칼럼을 통해 소득 없는 좌우 대립을 비판하고 한국인들의 앞날을 위해 단결할 것을 주문하는 한편 직접 산업 현장에 뛰어들어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는 등 실천적인 모습을 보였다. 나는 당대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을 고민하고 이를 실천으로 옮긴 그의 삶을 추적하면서 깊은 감명을 얻었다. 내가 동전(東田) 오기영(吳基永) 선생을 얼마나 따라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마음가짐을 항상 명심하며 간사 일을 한다면 나를 믿고 추천해주신 지도교수님과 앞으로 같이 신문을 만들어갈 새로운 동료들, 그리고 지면을 통해 만날 독자 여러분의 기대에 조금이나마 부흥할 수 있지 않을까.

 

박훈창 간사

 

삽화: 김채영 기자 kcygag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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