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신문』은 이번 학기부터 기자 칼럼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신설했습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로, 밤새 활동하는 부엉이처럼 항상 시대정신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깨어 있겠다는 『대학신문』의 각오를 상징합니다.


학술부 박재우 기자
학술부 박재우 기자

왜 이따위니 세상이 그지/내가 살아있는 곳엔 슬픈 일이 너무 많지/사람들은 외로움에 지쳐있다/누구도 누굴 이해하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 춤을 추면서/외로워 몸을 흔들면서/서로를 그리워하며/아무도 몰래 혼자서

언니네이발관의 <혼자추는 춤>을 듣는다. 언니네이발관 보컬 이석원은 광화문의 세월호 천막을 지나며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일은 왜 이렇게 외로운 것일까 곱씹었더랬다.

악몽 같은 세월호를 겪고 난 뒤 간절히 바랐다. 이후의 세상은 부끄러워할 줄 아는 세상이 되기를. 정의랄지, 공정이랄지 거창한 이름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적어도 ‘내가 죄인이요’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길 원했다. 인생이란 원래 부끄럽기 그지없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부끄러움이라는 공통의 감정을 통해서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즉 내가 불완전한 인간임을 알아야만 타인의 이견(異見)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난 그저 철없는 이상주의자에 불과했을까. 

2014년의 세상도, 2019년의 세상도 모두 얘기한다. “난 억울하다. 네가 더 잘못했다.”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틈이 없다. 지금은 전시(戰時)기 때문이다. 적을 이겨야 한다는 절박함은 사람들을 더욱 몰아세운다. 작은 부끄러움은 대의(大義)를 위해 기꺼이 죽어야 한다. 전시에 나의 영혼을 사색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여유를 부리고 있다가는 소설 『Catch-22』의 요사리안 대위처럼 정신병원에 끌려갈 뿐이다. 

사람들은 SNS로 자기 진영의 정보를 퍼 나르고, 서로 다른 ‘팩트’는 진영논리를 강화한다. 그리하여 토론은 전쟁이 됐다. 저들은 지역, 이념, 인맥의 이름으로 자신의 진영을 구축한다. ‘회색분자’에게는 라이트를 들이대며 “그래서 넌 어느 쪽이냐”라고 묻는다. 진영 내의 부끄러움을 얘기하면 배신자가 되고, 부끄러움을 토로하는 자는 전쟁터에서 피 흘린다. 

항간에서는 세대론에서 희망을 찾는다. 어떤 이는 586의 ‘견고한 카르텔’을 부수고 청년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라고 말한다. 우리는 정말 희망인가? 역사에서 비극이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은 항상 청년을 희망으로 내세웠다. 청년들 역시 자신을 새로운 시대의 상징으로 자부했다. 그러나 어느 세대든 뚜렷한 성과만큼이나 후대에 수많은 과제를 남기고 사라졌다. 특히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부끄러움 하나 없었다고 스스로 자기기만을 한 세대는 오히려 후대에 더 큰 죄악을 남겼을 뿐이다. 우리는 과거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선배들이 빠진 자기기만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다른가?

일단 ‘우리’가 맞을까? 이번 사태에서 우리는 청년이라는 이름에 숨겨진 다양한 계층을 발견했다. 같은 현상을 두고 서울대생, 고대생(소위 ‘인서울’ 대학생)과 ‘인서울’ 대학생이 아닌 자는 묘한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 사실 사회학자 오찬호의 책 제목대로 “우리는 차별을 찬성한다.”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기인한 합법적인 결과는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명분을 확보하고 대외활동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격차는 확장된다. 심지어 대학 안에서도 학부생은 학과별 입시 결과로, 대학원생은 학부 때 입학 여부로, 차별은 정당화된다. 나는 우리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이미 ‘우리’만의 스카이캐슬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든다. 우리는 다를 것인가?

언젠가 결국은 우리의 시대가 올 것이다. 시간은 지날 것이고, 어른들에게는 별다른 대안이 없을 테니까. 다만 궁금하다. 우리는 지금과 비교했을 때 무엇을 더 낫게 만들고, 반대로 어떤 과제를 남기게 될까. 수십 년 후에 제2의 ‘조국대전’은 없을 것이라 우리는 자부할 수 있을까. 

위기가 닥칠 때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희망을 되찾고자 애쓴다. 세월호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학신문』에 기고된 한 칼럼의 대목을 읊어본다. “아이들과 유족들을 위해 모두가 공동체의 빈소에서 울었던 장면을 기억할 것. 그리고 그곳에서 공동체의 정체성이 새로 정의되고 발견됐던 사실을 기억할 것. 그렇다면 아직 심연에서 끌어올릴 희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청년 때문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다름’을 껴안고 발버둥을 치며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기에 나는 소망한다. 우리의 부끄러움이 우리의 공동체성을 더 단단히 다지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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