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공학부 이광근 교수
컴퓨터공학부 이광근 교수

많은 게, 맹한 캠퍼스 풍경 때문일 거라는 무당 같은 마음에서 꺼내 본다. 캠퍼스 풍경을 바꿔줄 두 가지 디테일 이야기다. 역사의 깊이를 내실 있게 누리는 도시의 디테일이라고나 할까.

하나는 길 이름이다. 구체적으로, 겉돌지 말고 우리 주변의 인물을 길 이름으로 기리고 호흡하는 캠퍼스 도시를 상상한다.

파리가 그렇다. 데카르트부터 최근의 미테랑까지 구석구석 수많은 사람의 이름을 길 이름으로 사용한다. 우리가 알만한 사람뿐이 아니다. 우린 관심 없겠지만 그들에겐 의미 있었던 인물들로 넘친다. 3~4세기 인물부터 20세기 인물까지, 온갖 분야의 학자, 예술가, 기술자, 작가, 정치가 또는 왕정 시절의 인물 등.

관악 캠퍼스는 백지다. 410만 제곱미터 캠퍼스에 아무 길 이름이 없다. 정약용로도 없고 장영실로도 없다. 보석 같다는 시인 황진이로도 없고 백남준로도 없고 비주류 천재였다는 장승업로도 없다. 안중근로도 유관순로도 신채호로도 없다. 영정조 시대 비운의 천재 수학자였다는 김영로도 없고, 이휘소로도 없다.

이런 이름들이 길마다 붙은 캠퍼스? 우리 역사의 수많은 인물을 기릴 자신감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이런 자신감에 어울리는 문화 도시로서 그런 길 이름들이 세심하게 스민 캠퍼스. 길 이름표는 눈높이 기둥을 세워 매달거나, 건물 벽에 붙이거나, 부득이하면 길바닥에 정중히 깔아도 될 것이다. 실용은 덤이다. 4동 옆 74동도 27동 옆 129동도 길 이름이라면 누구도 어려움 없이 찾는다.

담백한 맛도 내자. 길 이름을 정할 때 소리로만 겉도는 호를 굳이 쓰려는 겉치레를 떨쳐내기다. 서울 시내 충무로는 이순신로가 아니다. 백범로는 김구로가 아니다. “충무로”나 “퇴계로”를 전하면서 이순신 장군이나 이황 선생이 내게 다가온 적이 없다. 짐작은 간다. 중국글자를 차용하면서 직접적인 뜻보다는 간접적인 소리로만 소통하는 관성이 끈질기게 남아있는 이유? 아마도 우리가 실체에 집중하는 절실함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어로 소수끼리만 소통해도 된다는 허위의식이 500년 이상 한 몫 거든 것도 있을 것이다. 의미를 쉽게 전달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 이런 언어생활의 습관. 이 껍데기를 벗기고 이름 짓는 맛을 관악 캠퍼스에 담아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 갖췄으면 하는 풍경은, 관정도서관 8층 열람실 아우라의 자존감이다. 관정관에서 가장 큰 728석 열람실이다.

그 방에서 저마다의 미래에 몰두하던 학생들은 종종 책장을 올려다보며 은연중에 어떤 분위기를 몸에 심을 것이다. 그렇게 심은 분위기는 장차 중요한 판단의 길목에서 무의식의 자원으로 작용하게 되고, 이런 재주를 필 열람실 인테리어의 결정적인 부품은 높은 책장에 빼곡히 꽂힌 책들일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우리나라를 짊어졌으면 하는 인재들이 수련하는 열람실, 그곳 분위기를 잡는 주인공이 제국 시절 영국 의회 보고서 양장본 전집들이다. 6,039권이 꽂혀있다. 맹탕이다.

전전긍긍했다. 런던에서 온 동료에게는 에비에비, 혹시나 볼까. 파리에서 종종 찾아오는 호기심 많은 동료는 이미 보고 갔다. 일기에 썼을 것이다. 서울대 대표 열람실을 가봄. 영국 의회 자료 무대였음. 에꼴노말이라면 상상할 수 없음. 기이함.

바꿔주길 바란다. 앞선 발자국에 눈이 멀어도 된 지난 백 년과 앞으로 백 년은 다를 텐데. 이 세상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앞서 개척해야 할 우리일 텐데. 이럴 때 주효한 부품은 자신감과 개뿔정신(chutzpah)일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그렇다면 열람실 장식의 주인공이어야 하는 건 오천 년 공부의 역사에 쌓인 우리의 학술 성과물 전집 정도가 아닐까.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내놓고 있는 존경스런 국역본들, 수많은 국역 문집총간, 문헌총록, 전서, 문학집성들. 국역 우리불교 경들. 별처럼 빛나는 근현대 문학전집들. 그리고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연행록, 일성록 등 감탄스러운 기록물의 국역본들. 이 모든 유산이 이곳 8층 화창한 열람실로 올라오셔서 그 높은 책장을 장식해주셨으면 한다. 6,039권은 쉽게 넘을 것이다.

해는 지고 갈 길은 멀다. 먼 길 응원해줄 이 두 개의 풍경. 그런 캠퍼스를 향유할 자격이 우리도 이젠 있지 않겠는가. 또, 문제적 동문이 자랄 싹은 그런 풍경으로 뽑혀버린다는 무당 같은 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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