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김채영 기자 kcygaga@snu.ac.kr
삽화: 김채영 기자 kcygaga@snu.ac.kr

추석 연휴에 영화 〈엑시트〉를 봤다. 청년 백수와 사회초년생이 유독가스로 뒤덮인 도시를 탈출하는 재난 영화였다. 알려져 있듯이, “우리 지금 상황이 재난 그 자체라고!”라 말하는 이 영화는 재난 수준이 된 청춘들의 현실을 빗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보여주듯 쓰레기봉투를 이어붙인 방재복을 입고서 유독가스를 피해 끝없이 내달리고, 수직으로 향한다. 이들의 탈출이 주는 신선함과 쾌감은 자신만의 가치를 지켜가면서 잠재된 가능성을 입증한다는 데서 기인한다.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됐던 암벽등반 실력이 탈출의 주 무기가 됐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미덕, 즉 타인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이들은 기꺼이 발휘한다. 이처럼 이들의 탈출에는 애정 어린 시선과 유머가 담겨있다. 그러나 ‘엑시트’, 즉 출구라는 제목이 상징하는 출구 없는 사회와 그에 대한 탈출의 서사는 ‘헬조선’과 ‘탈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우리 시대의 씁쓸함을 곱씹게 만든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공간’(space)과 ‘장소’(place)를 구분한다. ‘공간’은 어떠한 것에 구속되지 않는 개방, 자유와 관련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중요성을 두지 않기에 인간 존재의 실존을 위협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장소’는 개인이 부여하는 가치, 안전, 애정과 관련된다. 인간의 주체적인 경험을 통해 낯설고 추상적인 공간은 친밀한 장소가 된다. ‘헬조선’이라는 딱지가 붙은 우리 사회는 주체적으로 세계와 교감하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장소감과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친밀한 기억을 상기시키고, 감정을 풍부하게 하기는커녕, 기본적인 생존과 관련된 필요를 충족하기도 어려워 탈출을 꿈꾸게 하는 곳이다. ‘탈조선’을 꿈꾸는 많은 이들은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는 자들, 소유할 수 있는 자리가 없는 자들, 즉 장소가 상실된 자들이다. 

그러한 장소 상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다. 가난한 비정규직 인턴인 주인공이 구할 수 있는 집이란 허름한 고시원뿐이다. 주인공에게 허락된 최소한의 공간인 고시원은 교감이 가로막힌 타인들이 만들어낸 지옥으로 그려진다. 2005년에 나온 박민규의 소설 「갑을고시원 체류기」에도 사람다운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는 고시원에서의 고달픈 적응기가 그려졌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은 이미 고시원에서 나와 직장을 얻고, 결혼해 나름의 안정된 삶을 꾸리고 있는 시점에서 과거의 ‘웃픈’ 적응기를 추억하고 있다. 하지만 <타인은 지옥이다>는 그곳을 이미 탈출한 자의 회상이 아니라, 결코 누구도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은 ‘헬조선’에 관한 것이다. 그곳에선 옆방에서 범죄가 일어나고 있고,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주인공은 불쾌함과 착란, 공포를 경험하면서도 돈 때문에 쉽게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난주에는 5평 내외의 역세권 청년 주택이 화두에 올랐다. 사회 초년생이라는 점이 좁은 방에 살아도 괜찮다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의견과 그것은 주거 빈곤 사정을 모르는 이야기라는 의견, 그곳에서 돈을 모아 더 좋은 환경으로 옮기면 된다는 의견 등이 대립했다. 논란이 야기된 이유는 비좁은 원룸 그 자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조금만 참고 노력하면 좁은 고시원과 원룸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자체가 이미 무너져버린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과연 <엑시트>에서처럼 탈출할 수 있을까? ‘헬조선’과 ‘탈조선’이라는 우리 사회의 장소 상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유예현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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