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의원은 지난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내분을 회고한 바 있다. 당시 합의점을 찾기란 거의 불가했는데, 이는 각 의원들이 의견 전달의 방식으로 토론 대신 정론관에서의 개인 연설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설적 대화를 해야 할 자리에 들어차 있던 것은 단방향의 갈등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2010년대 후반의 우리 사회를 꿰뚫는 ‘소모적 갈등’ 역시 흡사한 양상을 보임이다. 소모적 갈등이 발발하는 장(場)에 있어 양측의 주체는 각자의 의견과 피드백을 교환하며 대안을 모색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내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든 말든 그저 내 정체성을 뱉어낼 뿐이다. 뒤르켐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하며 개인의 행위와 사고를 강제하는 사회적 기제를 사회적 사실(Societal Fact)이라 명명했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아도 숱하게 들려오는 우리 이웃들의 싸움 속에 담긴 소모성은 어느새 단단한 사회적 사실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는 인터넷 공간, 개중서도 특히 인터넷 커뮤니티가 위의 사회적 사실을 강화하는 또 다른 사회적 사실로 기능하고 있음이다. 이때 지극히 단편적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전형적인 사례로써 에브리타임(에타)의 분석은 상술한 배경 아래 가능하다. 연세대 학생들 몇몇에 의해 만들어진 이래, 오늘날 에타는 전국 수백여 개 대학의 온라인 커뮤니티로 기능하기에 이른다. 특기할 만한 점은 에타의 이중적 익명성이다. 닉네임, 더러는 IP 주소 등 유저와 유저 사이 최소한의 배타적 식별을 가능케 하는 통상의 커뮤니티와 달리 에타에서는 완전한 익명성이 실현된다. 운영진을 제외한 그 누구도 게시글과 댓글의 작성자가 누구인지 알 길이 전무하다. 에타의 모든 이용자는 단지 ‘익명’이란 이름으로 호명될 따름이다. 결국 우리가 이 작지만 거대한 공간에서 목도하는 것은 무책임의 극단이다. 남녀, 좌우, 지역 등 각계의 층위에서 흔한 갈등이 재현됨은 기본이다. 하루가 멀다 하도록 혐오와 분노로 쓰인 글이 게시되고 이윽고 추천 수를 10개 이상 받아 HOT 게시물로 선정된다. 메인 화면으로 게시물이 옮아가는 순간, 시간표를 확인하러 들어온 어떤 학내 구성원의 눈은 글의 제목을 향한다. 분노 또는 희열을 느끼며, 모두가 그렇다는 이유로 역시 비슷한 글을 생산해낸다. 반성과 자조의 목소리가 떠오르지만 그 정도로 모두가 부끄러움을 느끼기에 이곳은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한 듯하다. 너무나도 확고한, 사회적 사실이다.

위 글은 무색(無色)의 심상을 가진 진부한 명제일지도 모른다. 본인 역시 뚜렷한 색채의 날카로운 문형(文形)을 뽑아냄에 실패했음을 절감한다. 그럼에도 본인은 학내 구성원들이 느끼는 환멸과 의식을 하나의 언어로 가다듬고, 이를 기고함으로써 현실로까지 문제의 논의를 끌어오고 싶었다. 숱한 가상의 혐오를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겐 잠시 타자기를 내려놓고 무언가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일이 절실하다. 그리고 그 무언가란 대화를 통해 합의된 바를 의미할 것이다. 바로 그게, 그래도 조금은 더 바람직한 모습의 학내 커뮤니티라 확신한다. 에타는 원래 그런 곳일 수 있지만 우리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자연 현상에 대한 거부는 다분히 비인간적이지만, 사회적 사실에 대한 거부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일임을 기억하자.

엄성현

사회학과·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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