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패러다임' 차원에서 변화할 것

호주제 폐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민법개정안이 지난 2일(수) 통과됐다. 이로써 하나의 호적에 호주를 기준으로 가족 모두의 신분변동사항(출생, 혼인, 입양 등)을 기재하던 호적 편제 방식은 2008년 1월 1일부로 사라지게 된다. 호주제는 양성평등과 인격존중 원칙에 위배되고 변화된 가족상을 반영하지 못해 불합리한 차별을 낳고 있다는 근거로 지난달 3일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 불합치 판결을 받은 바 있다.

호주제는 헌법 불합치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위헌판결과 달리 호주제와 관련된 법의 효력은 새로운 민법개정안이 나올때까지 유지가 된다. 또 헌법재판소는 ‘위헌이다’라는 판결만 내리고 호주제 폐지 이후 민법개정과 관련된 사안은 입법부가 담당하기 때문에 민법개정의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호주제 헌법 불합치 판결, 새로운 신분등록제 논의 필수적


헌법 불합치 판결 이후 호주제와 관련된 민법개정안이 법사위를 통과했고, 그 주요 내용은 ▲남성우선의 호주승계 등 호주 관련 규정 삭제 ▲가족 범위 확대로 생계를 같이 할 경우 배우자의 부모와 시동생, 처제, 처남도 가족에 포함 ▲자녀의 성(姓)과 본(本)은 원칙적으로 아버지를 따르도록 하되 부모가 협의하여 어머니의 성과 본도 따를 수 있게 함 ▲자녀의 성과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법원의 허가를 받아 변경 가능 ▲동성동본금혼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8촌 이내의 혈족 간 혼인 금지 ▲입양아도 법률상 친자녀와 같은 권리 행사 ▲이혼 여성과 자녀 사이의 친자관계 인정 등이다.

이에 대해 여성계는 환영의 뜻을 표했다. 조현옥(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대표는 “호주제는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법적으로 명시하는 불평등한 제도이며 폐지가 확정됨으로써 양성평등의 법적 기반이 마련된 셈”이라고 밝혔다. 반면 비난의 목소리도 여전히 높다. 정환담(전남대 법대) 교수는 “호주는 단순히 한 가족의 호적상 대표일 뿐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호주제를 유지하는 범위에서 적절한 민법개정을 통해 다양한 가족형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가족의 범위 확대, 자녀의 성 협의에 따라 결정


개정된 조항들이 2008년에야 시행되는 것은 호주제 폐지에 따른 새로운 신분등록제도가 마련돼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 초 법무부와 대법원은 새로운 신분공시방안을 각각 발표했는데, 일부 사항만 다를 뿐 개인당 1개의 신분등록부를 만들되 가족들의 인적사항도 함께 기록한다는 점에서 두 안은 거의 동일하다. 이들 안에 따르면 새 신분등록부에는 출생, 혼인, 이혼 등 본인의 신분변동사항과 가족들의 성별,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기본인적정보가 기재되며 가족들의 신분변동사항은 기재되지 않는다. 그리고 본적은 부부의 협의로 정하되 협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부부는 각자의 본적을 유지하며 미혼자녀는 아버지의 본적을 따르게 된다.

이에 대해 본적과 정보공시 범위 문제를 중심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최용근 변호사(대한변호사협회)는 “가족공동체 해체를 우려하는 국민정서를 고려할 때 형제자매의 신분 정보 및 본적지는 반드시 공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반감을 주는 신분등록부라는 명칭 대신 가족등록부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박소현 상담위원(한국가정법률상담소)은 “미혼자녀가 결국 아버지의 본적을 따르게 될 가능성이 높다”며 “법무부의 본적 관련 안은 여전히 부계혈통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타리씨(다름으로닮은여성연대 활동가)는 “국가가 아닌 개인이 정보통제권을 가져야 한다는 점, 그리고 가족 정보까지 기재될 경우 ‘비정상가족’에 대한 차별이 존속된다는 점에서 정보공시는 최소한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타리 씨는 개인의 신분과 관련된 사항을 신분등록ㆍ변동 혼인등록ㆍ변동 등 목적에 따라 다른 신분기록부에 기재해 개인정보 보호에 중점을 두는 ‘목적별 편제 방안’을 제안했다.

법무부는 각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새 신분등록제 법안을 마련, 6월말까지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며 이후 국회는 검토과정을 거쳐 법안을 확정하게 된다.


한국사회 호주제 국가주의 유지에 기여하기도


한국사회에서 호주제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있다. 특히 해방 이후 국가는 호주제를 유지함으로 가족내 가부장적 문화와 강한 규범을 존속시켰고, 그러한 가족을 국가의 유지ㆍ발전을 위해 이용했다. 국가에게는 분단, 전쟁, 폐허로 이어지는 사회적 혼란기에 사회질서를 유지할 능력이 없었고, 당시 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강한 규범을 가진 가족의 역할이 컸다. 또한 당시 가족은 경제성장에 필요한 저임금 노동력과 고학력자를 동시에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70년대에 폐병에 걸려가며 밤낮으로 일했던 딸들과 소위 논팔고 소팔아서 대학에 보냈던 장남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호주제 폐지로 장남의 부담이 줄어들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온 나머지 형제와 딸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등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문화가 사라져 갈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경혜 교수(소비자아동학부)는 “호주제 폐지가 곧 가부장적 가족문화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라며 사회 전반의 변화 노력을 촉구했다. 실제 일본에서는 호주제 폐지 이후 농촌 사회 등 일부에서 제도 변화에 대항하여 더 강력한 가부장적 문화가 형성되기도 했다.

또 여성의 사회 진출이 더욱 가속화 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그동안 많은 여성들이 담당해왔던 가사노동 분야에서 발생할 공백상태도 문제로 남는다. 이에 대해 김미정 여성국장(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그동안 경시돼온 가사노동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며 “국가가 직업적 가사노동인력을 육성하고 가사노동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호주제가 폐지되면 기존의 가족 관념에 의해 ‘비정상적 가정’으로 간주되던 여성 중심 가구나 소년소녀가장 가구 등에 대해 ‘자선’ 차원이 아닌 적극적인 제도적 배려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8월 서울대 여성연구소가 발표한 「호주제의 사회ㆍ문화적 영향에 관한 학제적 연구」에 따르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여성노동시장과 조세제도의 분야에서 다음과 같은 변화가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남성가장에게 우선적ㆍ안정적으로 고임금의 일자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관념의 제도적 기반인 호주제가 폐지되면 노동시장에서의 성 차별이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양성 모두 무리 없이 생계부양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별도의 사회적 노력과 정책 개입이 있어야 가능하다. 또 남성을 가족 자산의 소유자로 간주하는 생각 때문에 남편 명의로 재산을 등기하고 보던 관행이 줄어든다. 그리고 입양이나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지만 생계를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혈연에 기초하는 부양가족 범위 규정 때문에 기본공제혜택에서 배제되던 사람들이 구제돼 평등한 경제생활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광억 교수(인류학과)는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호주제의 폐지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패러다임인 유교문화가 미국식 문화에 의해 대체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며 앞으로 두 문화의 대체에 따른 저항과 변화가 사회 곳곳에서 일어날 것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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