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 윤민정 대표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 윤민정 대표

수업과 수업 사이 시간이면, 인문대 자하연 느티나무 카페에는 늘 커피를 사 마시려는 학생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요즘 자하연 느티나무 카페는 굳게 닫혀있고, 문에는 ‘최소한의 존중을 얻기 위해 파업합니다’라는 대자보가 붙어 있다. 파업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습관처럼 커피를 사러 갔다가 아차, 하고 뒤돌아섰다. 나와 같은 착각을 한 학생들이 “아직도 파업 중이야?”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과연 ‘평화로운 파업’이란 존재하는가? 아니, 애초에 ‘평화로운 쟁의’ ‘평화로운 시위’가 있을까? 노동자들이 쟁의행위에 나선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소요와 불편을 야기한다. 2주 째 교정에는 파업 중인 생협 식당·카페 노동자들과 단식·천막 투쟁 중인 기계·전기, 청소·경비 노동자들이 틀어 놓은 민중가요가 울려 펴지고 있다. 파업 중인 노동자들은 학내 곳곳의 영업장을 돌며 항의 행동을 한다. 늘 그대로 있을 것 같던 학생식당들은 문을 닫았다. 이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불편하고 소란스럽다. 평화롭지 않으며 요란하다. 우리가 익숙했던 기존의 현실과 달라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반대로 묻고 싶다. 아마도 『대학신문』에 실린 이 칼럼을 읽고 있을 우리들 -학생들, 교수자, 연구자들- 이 평범하고 평화롭다고 생각했던 지난날들의 일상은 정말로 평화로웠는가? 그 ‘평화’와 ‘일상’이 유지되는 이면에는 말 그대로 다치고 병들어가는 식당 노동자들, 창고보다도 못한 휴게실에서 죽음을 맞은 청소 노동자가 있었던 것 아닌가?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애써 평화롭다고 생각해왔던 일상이 사실은 착취와 억압으로 가득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조짐들을 보고서도 애써 눈을 돌려 왔다. 조끼를 입고 다니고, 집회를 열고, 서명운동을 하는 노동자들을 마주치면서도 우리의 일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한 언론사에서는 작금의 상황을 두고 “학생식당이 멈추고 나서야 배식구 뒤에 가려졌던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이 드러났다”라고 표현했다. 나는 이 말에 너무나도 공감하며, 우리 모두가 지금의 현실 앞에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잘못했으니 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다. 유예해 온 현실이 눈앞에 드러난 이 순간, 우리는 노동자들의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다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릴 것인가? 나만의 이기적 평화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착취의 평화를 깨뜨리고 존엄을 요구하는 이들과 함께할 것인가?

나는 4학년이 된 지금까지 학교를 다니며, 강의실에서 정말 값진 것들을 많이 배웠다. 정치에 대해 논할 수 있었고,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완성하는 요소들에 대해 토론했다. 그렇지만 그것들보다 더 많고 값진 것을 학교라는 공동체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 법,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연대하는 법, 더 나은 시민이 되는 법을 배웠다. 동료의 죽음 앞에 통곡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곡기를 끊고 풍찬노숙하며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 노동자의 얼굴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이 현실을 알기 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운 교정에서,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순간을 지나가고 있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성이 계속되는 지금의 시간들이, 우리 모두가 진짜 평화가 무엇인지, 우리의 일상은 무엇으로 이뤄지는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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