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이슈가 되고 있는 ‘공감’ ‘소통’이란 단어로 글을 시작해 보고자 한다. 공감(共感)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해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소통(疏通)은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다. 중고등 교육 현장 뿐만 아니라 의료인, 법조인 등 여러 직역에서도 공감과 소통역량을 갖추기 위한 방안이 화두다.

몇 해 전부터 개인적으로도 공감과 소통에 대해 골몰하게 된 사유는 『대학신문』 12면 ‘대신 전해드립니다’ 코너에 ‘평화로운 일상을 잃어버려 당황스러운가요?’ 글을 읽으면서 명료해졌다. 국가적으로는 정권교체의 대혼란 시기가 있었지만, 내가 전에 속한 일터에서 나는 ‘성과’라는 미명 아래 과도한 경쟁 구도에서 우위를 선점하고자 타인의 고통에 관해서는 무관심이 미덕이 돼 버릴 만큼 눈 감는 것이 말보다 쉬운 일이 되는 것을 적잖게 경험했다. 그동안 내가 지켜온 공동체 의식, 신뢰, 공정경쟁이라는 가치관이 무너져 버릴 지경에 이르렀을 때부터 공감과 소통은 그 전과는 확연히 차원이 다르게 다가왔다. 당시 나는 ‘불합리한 의사결정 구조와 절차가 그대들은 당황스럽지 않은가요’라고 지속해서 물어보고 있었고, 돌아온 대답은 이럴 때일수록 이성과 냉정을 찾으라는 등 갖가지의 소화하기 힘든 충고들이었다. 

당시 내가 처한 상황과 입장에 대해 적극적인 공감을 표해 주지 않았던 타인들에 대한 원망에 한동안 괴로웠지만, 이 시점에서 자문해보면 감정을 절제해 무엇보다 다른 오해 없이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을 충분히 했는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고, 이를 인정하는 데는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안타깝게도 자신도 동일하거나 유사한 경험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지 않은 일이라면, 더욱이 자신에게 이득 될 것이 없을 것이라는 잠정적 결론에 도달할수록 타인의 상황에 귀 기울일만한 여유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대학신문』 1993호에서 다룬 Δ학내 노동자들의 집회 Δ역세권 청년주택 Δ하룻밤에 불타버린 40년의 세월 등 당장의 현실적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진정성에서부터, Δ43년 만에 돌아온 체육대회 Δ의학도서관 건립 Δ관악창업공간 Δ미국수의사회 인증(AVMA) 등 대학발전의 행보, Δ한일외교미래 Δ기후위기대응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 Δ소년법 ΔDNA 개정법 Δ노동자의 인권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판 등 일련의 기록들을 통해, 공감과 소통이라는 가치가 생생하게 반영돼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벼는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라는 말처럼 『대학신문』 기자들의 시선과 발걸음이 닿는 곳에서 태어난 유의미한 기록들이 촉진제가 돼 독자들과 소통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정화되고 한층 성숙해지기를 희망해 본다.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회복을 위한 기록의 힘, 『대학신문』의 힘을 믿는다. 

김은진 실무관

약학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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