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부 강동완 기자
취재부 강동완 기자

『대학신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라는 기자 칼럼 코너가 신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미네르바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는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등장인물로 더 친숙하겠으나, 그 유래는 그리스 신화에서 지혜를 관장하는 여신 아테나의 로마식 호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헤겔의 말처럼, 직접적 이해관계로부터 배제된 객관적인 태도로 옳고 그름을 지혜롭게 판별하자는 취지로 출발한 코너다. 

물론 아테나적인 가치가 완전한 진리는 아니다. 파리스의 심판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은 이는 아테나도 헤라도 아닌 아프로디테였다. 누구나 제 삶을 지배할 담론을 구성할 자유가 있다. 물론 파리스의 선택이 결국 제 죽음은 물론 조국의 쇠망마저 초래했듯이 그 책임은 스스로 감내해야만 한다. 앞서 언급한 헤겔의 경구는 한 시대의 본질로서의 시대정신이란 그 후대의 역사적 평가의 총체에 의해서만 온전히 규정될 수 있음을 뜻한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평가절하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마르크스 이후로 인류는 스스로 시대의 주인이 되리라는 강한 신념으로 역사를 개척해 왔다. 일제의 압제에 맞서 독립을 외치던 선조들과 군사정권 시기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화를 갈망하던 선배들은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으로 광장에 나섰다. 비록 몸은 땅에 묻히고 넋은 하늘에 산화했더라도 그 의지만은 광장에 남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이루는 근간이 됐다.

그러나 한때의 열정이 이제는 지독한 탐욕으로 변질했다. 오늘날 타성에 젖은 소위 지식인들은 앞에서는 정의를 부르짖으며 시민들을 광장에 내몰면서도 내심 더 큰 권력을 얻기를 꿈꾼다. 심지어는 제2의 촛불혁명이니 광장민주주의니 하는 찬사를 보내며 고대 그리스 폴리스민주주의를 운운하기까지 한다. 마치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 자아도취에 빠진 아테네인들을 보는 것만 같다. 

요새 몇 년간은 훗날 정치사에 ‘광장의 시대’라 기록될 듯하다. 광장의 힘으로 권력을 쥔 자칭 민주세력은 또다시 광장의 함성에 위협받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광장의 광기를 비난하던 이들이 이제는 오히려 갈등을 부추긴다. 삭발하면 애국자고 촛불 들면 깨어 있는 시민인가. 두 기득권의 논리가 충돌하며 공허한 말들을 허공에 뿌리고, 시민들의 등을 떠밀어 아비규환을 만들고는 공멸의 정치로 나아간다. 

촛불의 당위를 등에 업은 정권은 정작 명확한 계획도 비전도 없다. 그렇다고 태극기 물결에서 대안을 찾기도 어렵다. 민의란 이백만이니 삼백만이니 하는 부풀려진 숫자가 아니라 이성에 기초한 공론장에서의 사회적 합의로부터 도출된다. 개혁은 만들어진 광장의 광기가 아니라 정해진 법과 절차에 따라 이뤄진다. 하버마스가 말했듯 자신의 잘못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진영 논리로 몰아가는 태도는 민주적 개혁이 아니라 파시즘적 반동을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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