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한 소비자학과 박사수료
이보한 소비자학과 박사수료

생활과학대학이 올해로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1969년, 생활과학대학의 모태가 된 가정대학은 사범대학 가정교육과에서 독립해 13번째 단과대학으로 설립됐다. 이후 1997년에 가정대학의 명칭을 생활과학대학으로 변경해 지금에 이르렀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소비자아동학부 08학번인 나의 동기는 50명에 달했지만, 남학생은 7명에 불과했다. 전공 수업을 들을 때면 짧은 머리의 남학생은 유독 눈에 띄었고, 우리의 주요 터전이었던 13동에서 남학생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적은 남학생 수 때문인지 미팅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7명의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고, 매일을 붙어 다녔다. 우리의 존재감을 분출하기 위해 과대표도 맡았고, 개강파티와 같은 학과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축구 동아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남학생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남학생의 비율은 점점 늘어났다. 지금은 전공에 따라 모집단위가 분리됐지만, 내가 속한 소비자아동학부에 입학한 남학생이 20명이 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모두가 놀라워했다. 한편으로는 그간에 있었던 여학생 중심의 단과대학이라는 편견이나 오해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생활과학은 남녀공존의 학문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했을 때, 우리의 터전은 13동이 아닌 222동으로 옮겨져 있었다. 대학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정문에서 13동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유난히 눈이 많이 오던 날이어서 버스가 정문 이상을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두를 신고 그 길을 올라가면서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다. 논술 고사를 볼 때, 뒤에 놓인 라디에이터가 내는 ‘딱, 딱’하는 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명하다. 구술 고사를 보기 위해 대기실에서 복도로 나왔을 때, 그 을씨년스러움도 생각이 난다. 그러한 추억을 뒤로하고 222동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생활과학대학의 모습은 사뭇 웅장하기까지 했다. 비록 13동 시절 우리가 ‘사깡’이라고 불렀던 사범대 간이식당의 짜장면과 돈가스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지하 2층부터 지상 7층에 이르는 높은 건물에, 1층 라운지에는 우리가 늘 원했던 넓은 휴게 공간이 있다. 13동 시절에는 생활과학의 이해 수업을 듣기 위해 3월임에도 여전히 추운 28동 강의실을 찾았지만, 이제는 대규모 오디토리움식 강의실에서 쾌적하게 대형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접근성도 좋아져서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도 정문에서 넘어지지 않고 걸어올 수 있다. 그렇게 222는 우리의 숫자가 돼가고 있다.

대학원에 입학해서 두 학기 정도가 지났을 때, 근로 장학생 활동 중 하나인 생활과학대학 총동창회 목련회의 간사를 맡게 됐다. 워낙 높으신 선배님들을 모시고, 다양한 행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걱정을 많이 했다. 그렇게 긴장 속에서 첫 행사를 진행하고, 이 모든 것이 기우였음을 알았다. 그때 당시 목련회 회장님은 권위가 아닌 배려와 이해로 나를 대해주셨고, 구성원 한 분 한 분 모두 나를 그저 사랑스러운 후배로 생각해주셨다. 어느새 나는 1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간사로 활동하게 됐다. 간사 활동을 하면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바는 선배님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과 학문에 대한 사랑이었다. 매월 진행되는 학과별 강연에는 80명 이상의 선배님들이 참석하셨고, 1시간 남짓한 강의가 끝난 후에는 날카로운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매년 4월 둘째 주 토요일에 개최되는 정기 총회에는 200여 명에 육박하는 선배님들이 자리를 빛내주시기 위해 어려운 걸음을 하셨다. 이분들을 보며 개인적으로 연구자로서 나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또한 지금 생활과학대학에서는 이분들의 의지를 이어받아 발전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학문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가고 있다.

‘지천명’. 사람에게 있어 50세는 하늘의 명을 알게 되는 나이라고 한다. 반백 살이 된 생활과학대학은 생활인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지난 50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와 도전을 거듭하면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며 달려왔다. 지난 반백 년 동안 이뤄낸 생활과학대학의 기반이 있었기에 지금의 생활과학도가 역량을 갖춘 연구자로, 훌륭한 리더로, 사회적 멘토로 꽃피우기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가올 생활과학의 미래에는 지금의 이 시간이 또 하나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자랑스럽게 채우기 위한 생활과학대학의 여정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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