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부 정인화 기자
사회부 정인화 기자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같은 반에 따돌림을 심하게 당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은제(가명)였는데, 몇몇 아이들은 툭하면 그에게 욕을 하고 물건을 던졌으며 간혹 그를 심하게 때리기도 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주도적으로 따돌리지는 않더라도 은제를 피하고 무시하고 방관했으며 담임선생님도 아이들의 괴롭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교실 안의 모든 사람이 공범이었던 셈이다. 당시 나는 괴롭힘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도, 다른 아이들처럼 방관하는 것도 무서워서 어중간한 태도로 은제를 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전학을 가버렸다. 그해 말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담임선생님은 일 년 동안 반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을 모아뒀다가 한 번에 나눠줬다. 그 안에는 낯선 그림이 섞여 있었는데, ‘친구 사랑의 날’ 행사에서 누군가 나를 그린 뒤 내 이름을 써둔 것이었다. 나는 종이 귀퉁이에서 은제의 이름을 발견하고 형언할 수 없는 마음에 주인 없는 그림을 가방에 넣어 집에 가져왔다.

몇 해 지나 6학년이 되면서 나도 전학을 갔는데, 옮겨간 학교에서 또다시 다혜(가명)라는 반 친구가 따돌림을 당하는 걸 봤다. 전보다 머리가 큰 아이들은 더욱 폭력적이면서 교묘한 방법으로 다혜를 괴롭혔고 따돌림의 단위는 반을 넘어 학교 전체로 커져 있었다. 다른 학교 아이들도 모두 그녀의 이름을 알 정도였다. 은제의 일이 생각났던 나는 전학생의 특권(?)을 이용해서 그녀에게 친근하게 말도 붙여보고 하교도 같이 했는데, 다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녀에게 가까이 가기만 해도 반 아이들은 수군거렸고, 새로 사귄 친구들은 나를 불편해 했다. 담임선생님이 수학여행에서 다혜와 한 조가 돼 달라고 부탁하자 친구들은 나에게 태도를 확실히 하라며 다그쳤다. 나는 조금씩 움츠러 들었고, 다혜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시기에 다혜에게 연락이 왔는데, 그녀는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내게 잘 지내냐고 물어왔다. 철 지난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최근 ‘수원 여중생 노래방 사건’ 같은 학교 폭력 사건들이 SNS에서 연이어 화제가 되면서 사람들은 청소년 범죄가 점점 잔인해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지난 경험에 비춰보면 특별히 ‘요즘 아이들’이 그들의 말처럼 더 폭력적이거나 영악하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내가 경험한 청소년은, 교실은, 학교는 항상 그래왔고 나는 그들의 일부가 되기도, 제3자가 되기도 하며 이를 몸소 느꼈다. 아이들은 너무나 쉽게 악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악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들의 양심은 특히 군중 속에 섞여 있을 때 무뎌졌다. 마치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이 형상화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요즘 학교 폭력 가해자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악인으로 취급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자꾸만 답답해진다. 그들이 저지른 폭력은 분명 용서받기 어려운 악행이지만, SNS로 그들을 욕하고, 인신공격하고, 나체 사진을 올리는 네티즌들 중 학창시절에 피해자들에게 손을 내밀어줬던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은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가해자를 악마적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은 대다수 인간의 선량함을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악은 평범하며 누구나 저 악인 중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분노한다.

당시 은제와 다혜를 괴롭혔던 아이들은 지금 제각기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아마 수원 여중생 노래방 사건을 접하고 극악무도한 행태에 경악하고 치를 떨며, 청소년 범죄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때 너도 그랬지 않느냐’라고 묻는다면 그 일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거나, 기억하더라도 그땐 어려서 철이 없었다고 어물쩍 대답하지 않을까 추측한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기억의 비대칭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그들에게 악몽의 일부였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자꾸만 터져 나오는 학교폭력 사건에 대해 마음 편히 욕하고 비난하기가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방관자가 내비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