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IRB 제도의 현주소를 파헤치다

우리나라 헌법은 부당한 제재나 간섭 없이 자유롭게 학문을 탐구할 수 있는 권리인 ‘학문의 자유’를 보장한다. 하지만 모든 권리가 그러하듯 학문의 자유 역시 무제한으로 추구될 수 없으며 그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지닌 연구일지라도 연구참여자를 착취하는 과정을 정당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학이나 병원 등의 연구기관에서는 ‘IRB’라는 기구를 설치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가 생명윤리에 관한 사항들을 잘 지키고 있는지 심사한다. 그렇지만 편리하고 효율적인 연구환경을 조성하려는 노력에 비해 안전한 연구의 원칙을 수립하려는 노력은 역사가 짧아, 여전히 관련 쟁점에 있어 논란이 불거지는 경우가 많다. 윤리적인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갖춰야 할까?

 

좋은 목적을 지닌 연구라면 그 과정도 윤리적이어야 한다

IRB는 Institutional Review Board의 약어로, 우리말로는 기관생명윤리위원회, 연구윤리심의위원회 등으로 변역된다. ‘인간대상연구’의 윤리적 측면을 심사하는 기구인 IRB는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생명윤리법)을 기반으로 한다. IRB 활동의 기본원칙을 명시하는 생명윤리법은 인간대상연구를 크게 세 분야로 정의한다. 먼저 사람을 대상으로 물리적으로 개입하는 연구가 있다. 여기에는 연구참여자의 환경이나 연구참여자를 직접 조작해 자료를 얻는 임상시험, 인체유래물* 연구와 사회과학연구의 실험 등이 해당한다. 두 번째는 의사소통 및 대인 접촉 등의 상호작용을 통해 수행하는 연구로, 행동관찰과 대면 설문조사를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를 이용하는 연구가 있다. 인터넷상에 공개된 정보일지라도 연구참여자를 직간접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개인정보를 활용하는 연구라면 이 역시 IRB의 심사대상이다. 서울대 연구윤리팀 김시형 행정간사는 “인간대상연구는 자칫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거나 인체에 위해를 끼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IRB의 심의를 거쳐 연구절차와 방법에서 생명윤리와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연구에서 생명윤리를 고려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그 원칙을 논의하면서 IRB도 도입됐다. 그 시작은 나치 소속의 의사들이 잔인한 인체실험을 저지른 사실이 밝혀진 제2차 세계대전 전범재판이었다. 1947년에 연합군재판부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 지켜야 할 10가지 원칙을 담아 ‘뉘른베르크 강령’을 발표했다. 임현우 교수(가톨릭대 예방의학과)는 “뉘른베르크 강령에서 처음으로 제시된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연구참여자의 자발적인 동의(Voluntary Informed Consent)’ 개념은 IRB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항목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1964년 세계의사협회는 뉘른베르크 강령을 수정·보완해 만든 ‘헬싱키 선언’을 발표했다. 임현우 교수는 “이런 과정을 통해 법률가들이 의학연구의 윤리성을 판정하는 기준을 구상한 데 이어 의사들이 스스로 연구윤리 지침을 세워 준수하려는 노력이 이뤄졌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1960~70년대에 신약개발 연구가 활발해지며 비윤리적인 실험들은 여전히 음지에서 진행됐다. 그 실태는 미국 공중보건국의 의사들이 알라바마 주 터스키기에 거주하는 흑인남성을 대상으로 수행한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의 전모가 1972년에 밝혀지며 결국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들은 1932년부터 40년 동안 매독에 걸린 416명의 흑인남성의 자연경과를 관찰하며 1943년에 매독을 치료하는 페니실린이 개발됐음에도 환자에게 알리지 않고 의도적으로 치료를 막기까지 했다. 임현우 교수는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 이후 미국에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법적인 관리체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공공연해졌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1974년에 미국에서 국가연구법이 제정되며 IRB의 관리·감독이 제도화됐다. 국가연구법을 통해 꾸려진 위원회는 5년 뒤 ‘벨몬트 보고서’를 발표해 오늘날 IRB 심의의 근본이 되는 인간존중(Respect for Persons), 선행(Beneficience), 정의(Justice)의 윤리원칙을 수립했다. IRB의 세부 심의기준은 이 원칙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인체유래물: 인체로부터 수집하거나 채취한 조직·세포·혈액·체액 등 인체 구성물 또는 이들로부터 분리된 혈청, 혈장, 염색체, DNA, RNA, 단백질 등을 가리킨다.

 

생명윤리를 지키기 위해 당신의 연구를 시작하기 전 기억해야 하는 것

IRB 심의는 어떤 구체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될까? 각 기관마다 차이는 있지만 IRB 심의는 연구계획서와 서류들을 구비해 대체로 연구가 시작되기 최소 두 달 전 신청하도록 권고된다. 심의에 필요한 서류를 잘 준비했는지 확인하는 ‘행정검토’가 끝나면 각 연구는 ‘심의면제’, ‘신속심의’, ‘정규심의’의 대상으로 분류되고 그에 따라 심의방식과 소요기간도 달라진다. 김시형 행정간사는 “분류의 기준은 각 연구가 지닌 위험성의 정도”라며 “기존에 공개된 자료를 이용하는 연구의 경우 일상적으로 겪는 수준 이하의 위험성을 지닌 것으로 봐 심의를 면제한다”라고 설명했다. 신속심의나 정규심의에 속하는 연구들은 이후 추가적인 절차를 거친다. SNUIRB 제1위원회의 전문간사인 이재림 교수(아동가족학과)는 “신속심의에 해당하는 연구들은 근접한 연구분야의 위원 한 명이 심사하고, 정규심의 대상 연구들은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회의에서 함께 검토한다”라고 말했다. 심의를 거쳐 승인된 연구들은 일정한 기간 내에 ‘종료보고’를 해 연구참여자 보호조치를 제대로 이행하며 연구를 끝마쳤음을 확인받아야 한다.

IRB 심의는 각 연구마다 개별적으로 이뤄지지만 중요하게 고려되는 사항들은 언제나 동일하다. IRB는 먼저 연구계획서의 과학적 타당성을 검토한다. IRB는 과학적이지 않으면 윤리적이지 않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연구가 구조적으로 잘 설계돼 수행할 가치가 있는지를 우선 살피는 것이다. 이후 각 연구가 벨몬트 보고서의 윤리원칙을 준수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음의 세부 주제들을 심사한다. ‘인간존중의 원칙’을 심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설명에 근거해 연구참여자가 자발적으로 연구참여에 동의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는지 살핀다. 이재림 교수는 “특히 영유아, 노인, 장애인, 학생, 수감자 등 인권 침해에 취약한 연구참여자가 동원되는 연구의 경우 이들이 실질적인 동의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보호조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선행의 원칙’은 주로 위험/이득의 평가와 개인정보 보호 방침을 심사할 때 적용된다. 이 교수는 “각 연구는 연구참여자에게 끼치는 위험을 최소화하고 연구결과로 사회에 가져다줄 공익을 최대화하도록 설계된 경우에만 수행될 수 있다”라고 부연했다. 마지막 ‘정의의 원칙’은 터스키기 생체실험 사건에서도 문제가 됐던 측면을 반영한 것으로, 연구참여자를 사회적 차별 없이 공정하게 선택했는지 확인할 때 적용된다. 김시형 행정간사는 “각 기관에서는 국제 협약과 생명윤리법을 준수하는 고유의 표준운영절차를 만들어 심의기준을 최적화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IRB 절차와 기준이 인간대상연구 전반에 걸쳐 확립된 것은 오래전 일이 아니다. 미국의 국가연구법을 이어 받아 2004년에 제정된 생명윤리법이 2013년의 전면개정을 거치고 나서야 대학 IRB의 운영이 본격화됐다. 임현우 교수는 “의생명 분야의 임상시험을 심사하는 병원 IRB의 활동은 1990년 설립된 가톨릭중앙연구원 IRB를 시작으로 이미 활성화 돼 있었지만 이를 제외한 분야의 연구를 취급하는 대학 IRB는 그렇지 못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연구윤리와 관련된 논란이 임상시험에서 먼저 떠오른 만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의약품의 연구개발을 감독하는 의약품임상시험관리기준을 1987년에 이미 마련했기 때문이다. 2013년의 생명윤리법 전면개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외의 분야에서도 IRB의 필요성이 제고됐음을 시사한다. SNUIRB의 위원장인 서이종 교수(사회학과)는 “줄기세포·유전자 등의 인체유래물을 다루는 연구의 규모도 점차 확대됐고 기존에 규제받지 않았던 행동관찰·설문조사에도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심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졌다”라고 설명했다. 연구참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은 이처럼 병원과 대학 IRB 운영 간 차이를 수반하며 발전돼 왔다.

 

자유로운 학문 탐구와 윤리적인 연구문화 정착이 함께 가려면

대학 IRB가 오늘날과 같은 수준으로 운영된 것은 약 6년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IRB의 심사가 아직 다양한 연구분야의 구체적인 실정과 맞지 않아 연구를 지나치게 제약하는 측면도 있다. 이는 2013년 이후 새롭게 IRB의 심의대상이 된 분야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유연하지 못한 생명윤리법과 다소 경직된 IRB 행정=IRB 제도 자체가 의생명 분야에서 태동했기 때문에 IRB는 상당 부분 임상시험의 엄격한 기준들을 바탕으로 한다. 이재림 교수는 “신약개발과 설문조사는 위험 수준에 기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평가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한다”라며 “그 때문에 심사가 지나치게 까다롭거나 불필요하게 심사에 긴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가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IRB 운영에 관한 사항들을 법률로 규정하는 비율이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에 비해 높은 편이다. 이는 연구자의 임의적 판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심의면제에 해당하는 연구의 비율을 지나치게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오종환 강사(연합전공 정보문화학)는 “개인정보와 관련된 생명윤리법의 규정 때문에 설문조사 시 사례 지급을 위해 전화번호를 기재하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심의면제를 받을 수 없다”라는 일례를 제시했다.

법적인 문제뿐 아니라 IRB를 관리하는 행정체계상의 문제도 있다. 연구자들은 연구계획서를 승인받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서 가장 곤란을 겪는다. 오종환 강사는 “심의에 소요되는 시간은 예측할 수 없는 데 반해 연구자 입장에서는 논문 마감이나 학회 일정을 맞춰야 하는 부담이 크다”라고 언급했다. 아직 외국에 비해 심의 지침이 부족하기 때문에 임의적인 판단을 방지하기 위한 행정적인 보완도 필요하다. 김현석 교수(언론정보학과)는 “같은 온라인 회사의 설문조사를 이용하는데도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서로 다르게 안내되는 등 심사 강도의 편차가 느껴지는 경우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제도적 개선과 운영체계의 안정화가 병행돼야=우리나라 생명윤리법은 대체로 미국의 정책을 따라왔기 때문에 문제점을 수정할 때도 미국의 연구환경 동향을 주시한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연구참여자 보호를 위한 연방정책인 커먼룰(The Common Rule)을 전면개정했다. 새롭게 정비된 커먼룰은 IRB 절차를 간소화함으로써 효율적인 IRB의 운영을 도모했다. 서이종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연구윤리 질서가 자리잡혀가는 이 시점에 당장 커먼룰의 개정 방향을 따라가는 것은 시기상조지만 현재의 제도가 연구자에게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라며 “연구윤리 문화가 잘 정착돼 감에 따라 점차 커먼룰의 기조를 반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률과 지침의 관계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서 교수는 “다양한 상황에서 유연한 심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법률에서 지나치게 많이 규정한 내용을 지침으로 위임할 필요도 있다”라고 덧붙였다.

행정적인 측면에서는 먼저 전문 인력의 충원과 함께 관리체계의 안정화가 요구된다. 김현석 교수는 “밀려들어오는 연구의 양에 비해 IRB의 행정을 관리하고 심사 데이터를 축적해 나가는 전문 인력이 부족해 충원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는 대학당국이 연구윤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행정적인 지원을 늘려야 IRB 운영 과정이 안정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불어 꾸준한 논의를 통해 IRB 심의를 둘러싼 시스템 전반을 체계화시킬 필요가 있다. 서이종 교수는 “다양한 연구에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는 심의 지침에 대한 논의를 보편적이면서도 복합적인 관점에서 지속해 나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연구윤리를 둘러싼 지적 풍토가 제대로 확립되지 못했다. 김시형 행정간사는 “IRB 심의는 일종의 신호등”이라고 비유했다. 김 간사는 “연구참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식이 부재했을 때는 무단횡단을 하기도 했지만, 오늘날과 같이 큰 연구들이 오고가는 대로변에서는 초록불이 켜지기 전까지 숙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IRB 제도가 보호하려는 대상은 연구자들이 좋은 연구를 수행해 거둔 이익을 돌려주려는 대상과도 일치한다. 조금 더 빠르고 효율적인 IRB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는 동시에 연구의 윤리성을 고민하는 태도가 성숙된다면 앞으로 더욱 안전한 연구문화를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초록불을 기다리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시간의 무게만큼 우리는 더 책임감 있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IRB 신호등의 노란불 앞에서 윤리적인 연구의 원칙을 고민해야 하는 까닭이다.

 

삽화: 김채영 기자 kcygaga@snu.ac.kr 

인포그래픽: 이승연 학술부장 dusaltjd123@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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