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외교학부 석사졸업 고용준
정치외교학부 석사졸업 고용준

이립(而立)을 갓 넘긴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남과 다른 무언가를 찾고 거기서 ‘나다움’의 정체성을 찾아오지 않았나 싶다. 우연찮게 집에 들어온 1970~80년대 아동문학·역사책 속에 파묻히며 1990~2000년대를 살아가던 또래들과 정신적으로 다른 시대에 살아왔던 탓일까. ‘꼰대’ 감성으로 철저히 무장된 애늙은이에게 주어진 경이로움 반, 불편함 반의 시선을 알게 모르게 즐겼던 것 같다. 또래들보다는 부모님·조부모님 세대의 경험과 문화에 공감하며 어른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의 정체성을 체화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느끼게 된 ‘별남’의 인식을 통해 ‘나’라는 개체의 독자성을 찾아 나갔던 것이다.

육지―제주도에서는 한반도 본토를 이렇게 칭한다―에서의 대학 생활은 이러한 나의 정체성에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팔도(八道)에서 모여든 선배·동료·후배들의 탁월함에 견줬을 때 나의 ‘별남’은 더 이상 독특하지 않았다. 강의를 들을 때마다 그간 내 사유체계를 이뤄 왔던 통념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수차례 겪자, 이제까지 얄팍한 지식을 갖고 학자연(然)해 왔던 일들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졌다. 뒤늦게 찾아온 ‘지적 사춘기’라고나 할까.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나는 스스로를 주위로부터 고립시키고 매사에 방어적으로 임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나를 지탱해 준 소속집단은 ‘가족’과 ‘고장’이었다. 마치 개화기 유생들이 ‘척사위정(斥邪衛正)’의 기치를 내걸며 성리학적 가치에 매달렸듯이―또는 북한이 ‘유격대국가’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하고 핵·미사일 개발을 고수하듯이― 정체성의 위기 시에는 가장 익숙했던, 그래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요소들을 재발견하고 더욱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강하게 의식한 것도, 제주도 고유의 방언과 문화에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윽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름뿐인 고시생 노릇을 한 것이 두 해, ‘손절’ 후 학부를 마치고 병역을 수행한 세월이 3년 하고도 석 달. 그리고 온전한 대학원생으로는 채 한 학기를 지내지 못하고 전공 학사 조교로 소환(?)된 지 만 2년이 넘어갔다. 언뜻 보기엔 평탄한 석사학위 취득자의 경로일 수 있지만, 신분이 바뀔 때마다 주어지는 새로운 역할에 몸과 마음을 맞추기란 마냥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체성의 변화는 곧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꾸는 일인 까닭이다. 물론 세상 그 자체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주간에는 조교로, 야간에는 학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2년여의 기간은, 나에게 또 다른 차원의 정체성 혼란기가 되고 있다. 조교 업무를 보며 보람을 느낄 때도 꽤 있지만, 가끔씩 멍하니 자리에 앉아 내가 학교에 공부하러 왔는지 일하러 왔는지 심각하게 자문(自問)해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과장을 좀 보태 말하자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클락 켄트와 슈퍼맨,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이 겪었던 혼란이 이런 것이었을까 싶다. 아니, 어쩌면 저녁 식사 후 최소 2시간이 소요되는 내 변신이야말로 특별히 제조한 약을 먹으면,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나오면, 박쥐동굴에서 숙련된 집사의 도움을 받으면 손쉽게 이뤄지는 그들의 변신보다 더 어려운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망상마저 든다.

20대 시절의 내게 가장 큰 실존적 고민이었던 이러한 정체성의 편력(遍歷)은, 비단 개인 차원에서만 벌어지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느 공동체나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맞춰 새로운 자기인식(self-definition)을 창출해 갈 텐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정체성과 부조화를 겪게 된다. 특정한 정체성이 내부적으로 정립되더라도, 이는 상호작용하는 여타 공동체의 변화된 정체성과 동조 내지 충돌하면서 또 다른 산고적(産苦的) 변용을 거치기 마련이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로 삼고” ‘잘 살아보세’를 외쳤던 대한민국이, ‘한반도 운전자’를 자처하며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를 표방하게 된 것은 가장 극적인 사례가 아닐까 한다. 그렇지만 촛불과 태극기, 광화문과 서초동의 병존(竝存)은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내부적 경쟁이 현재진행형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와중에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국들의 정체성 변화도 뚜렷이 감지되고 있다. 국제정치의 영역에서 이 정체성이란 녀석은 어떻게 구성되고 움직이는 것일까? 박사과정 공부를 이어가게 된다면 내 30대는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는 여정이 될 것 같다.

공적(公的) 지면이 사적인 하소연으로 채워지게 됐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TMI를 제공해드린 것은 독자 여러분께 이하의 질문을 감히 여쭙기 위함이었다. 여러분의 정체성 편력은 어떠신가요? 각자의 정체성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계시는지요? 서서히 물들어가는 단풍잎을 벗 삼아 잠시나마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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