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훈 사회부장
김용훈 사회부장

성인(聖人)으로 태어나지 못한 데 그리 불만 없다. 등굣길의 인파에 짜증이 치밀고 자잘한 일로 흥분하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 됨됨이가 딱 그 수준인 것뿐이다. 다만 사람들과 얼굴 맞대고 얽혀 살기 위해 소소하게 조심한다. 성이 날 때면 한 번이라도 더 참고, 점잖지 못한 말이 목구멍까지 넘실대면 눌러 삼킨다. 

이런 몸가짐은 우리가 예의라 부르는, 되도록 따라야 할 규칙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살아오며 스쳐간 몇몇은 그렇지 않았다. 예의와 염치를 위선의 영역으로 내모는 이들이 있었다. 서로 미소 짓기 위해 꼭 갖출 무언가를 무시하고, 공감보다는 뒤틀린 이성에 호소했다. 토해낸 문장이 논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선 긋는 일에 매몰돼 그 결과에는 눈을 감았다. 정당하지만 무의미한 말이 있고 옳지만 타인을 아프게 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 텐데, 어떤 마음씨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더욱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최근 이름도 진부해진 그로 인해 학내외가 어수선했다. 그 소란을 보며 기대를 실망으로 갚은 그가 어서 물러나길, 그로써 갈등이 잦아들고 개혁이 이어지길 바랐다. 딱 그 정도의 미적지근한 생각을 갖고 오랜 친구들을 만나 민망한 일을 겪었다. 술자리에서 그의 이야기가 나와 대수롭지 않게 앞의 의견을 전하는데 어느새 꽤나 어색했다. 대화의 맥을 짚지 못하고 눈치 없는 말을 잇는 느낌이었다. 얼른 말을 끊고 귀를 기울이니 곧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조국이되 그가 장관이 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나야만 운동장에 발 디딜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쓰고 시릴 뿐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논란의 ‘그 대학’에 다니는 내가 늘어놓았으니, 친구지만 얼마나 얄미웠을까. 

그때 깨달았다. 무례한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고, 예의와 염치를 잃는 건 한순간이다. 잠시라도 앞에 앉은 사람으로부터 시선을 거두면 예상치 못한 내 가시가 그를 찌를 수도 있다. 심보가 뒤틀리거나 공감 능력을 잃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원체 우리 발밑만을 보고 살아왔기에 의식적으로 주위를 살피지 않으면 쉬이 실수를 범할 뿐이다. 

그가 잘못하고는 애꿎은 서울대생이 지목되는 이 상황 무척 불쾌하다. 그렇지만 서울대 재학생 가정의 평균 소득이 유난히 높다는 비판을 잦게 들었고, 서울대가 그간 불평등의 온상으로 기능했다는 평가 역시 설핏 알고 있다. 무엇보다 서울대생이 조국 반대에만 혈안이 돼 교육의 격차에는 입을 씻는다면 사회가 우리를 어떻게 볼지 이제는 잘 안다. 우리는 하루의 절반을 학교에서 보내지만 언젠가는 그 너머에서 한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녹슨 ‘샤’에 무언가 얼룩진 과오가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공범이자 방관자라면 나서서 사과하자. 우리는 성인(聖人)으로 태어나지는 못했다만 인간으로 태어났지 않은가. 먼지가 가라앉을 때를 기다리며 염치로 새겨두자. 우리, 언젠가는 예의를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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