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김연경(소설가ㆍ노어노문학과 강사)

나의 어릴 적 꿈은 물론, ‘글쟁이’였다. 하지만 백일장 따위에 나가면 번번이 떨어졌다. 그래도 나는 꼬박꼬박 일기를 쓰면서 위대한 작가가 되겠노라고 다짐하곤 했다. 더 기고만장한 건 무턱대고 그 가능성을 믿었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재주가 없는 아이였다. 달리기는 늘 꼴찌였고 노래는 거의 음치였고 그림은 젬병이었다. 내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은 글 읽기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교과서 말고는 책이 거의 없었다. 어린 시절 내가 읽던 책들은 주로 도서관이나 친구 집, 친척집에서 빌려 오거나 슬쩍 훔쳐 온 것들이었다. 읽은 책이 많았을 리도 없다. 그랬기 때문에 나에게 책 읽기는 뭔가 대단하고 은밀한 것이 되었던 듯하다.

내가 유난히 좋아했던 글방문고판에는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길고 낯선 이름도 있었다. 『죄와 벌』이라는 제목의 왠지 비장미가 뚝뚝 떨어지는 책. 글방문고의 샛노란 종이, 빼곡하게 들어찬 올록볼록한 활자들, 붉은 불꽃이 활활 타오르던 표지를 나는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중학교 때의 일이다. 내가 두어 살 정도 나이를 더 먹었을 때 우리 가족은 단칸방에서 다락방이 딸린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때 나는 거금을 들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붉은 색과 검은 색의 굴곡이 꿈틀거리고 둥근 원이 떠다니는 표지부터가 어째 심상치가 않았다. 이른바 ‘자율학습’을 끝내고 11시는 족히 된 시간에 학교에서 돌아와 여동생과 함께 쓰던 다락방으로 올라가면, 이 책이 녹슨 철제 책상 위에 활짝 펼쳐져 있었다.

삼형제, 아니 사형제가 패륜적인 아비를 한가운데에 두고 도끼 살인 사건보다 더 흉악한 음모를 꾸미거나 여기에 휘말려든다. 도대체 누가 표도르를 죽였을까? 멍청한 드미트리일까? 잘난 척하는 맹꽁이 이반일까? 설마 착한 알료샤가 늙은 아비의 등에 칼을 꽂은 건 아닐까? 결국 참지 못하고 소설의 일부를 건너 뛰어 뒷부분을 먼저 본다. 이름도 참 기괴한 하인 녀석 스메르쟈코프가 범인이었다니. 뒤통수 한 대를 멋지게 얻어맞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추리소설적 장치보다도 나를 더 흥분시킨 건 바로 「대심문관의 전설」이었다. 인간과 세계의 모든 비밀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법을 빌자면, 모든 진리가 꼭 「대심문관의 전설」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대심문관의 기나긴 독백이야말로 그 당시 내가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던 말이었던 것이다. 왜 누구든, 지금보다 훨씬 용감했던 어린 시절에는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에 치를 떨면서 나 홀로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지겠노라 갈망해보지 않았던가.

이렇게 『죄와 벌』 뒤에 찾아온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내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야 말았다. 현재,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이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여고시절 그토록 낯설었기에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이 작가는 지금 내게 그 어떤 이름보다 익숙한 것이 되었다. 익숙함이 권태로움으로 이어지지 않으니, 당분간은 헤어지고 싶지 않다.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나름대로 멋진 선택이었던 거다. 글쟁이의 꿈이 계속 나의 뇌수를 만지작거리는 지금, 예순 살쯤 되었을 때 내가 이만한 소설을 한 편 남길 수 있다면, 그건 더 멋진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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