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부 이민주 기자
문화부 이민주 기자

예술은 취향의 영역이다. 내가 한참을 쳐다본 광경에 누군가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유명 작가의 책에서 내가 느꼈던 지루함은 출처조차 모를 글에서 해소되곤 한다. 내게 절대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다른 이에게 한없이 하찮을 수 있다는 사실은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자신의 취향대로 예술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한 취향이 또 다른 취향과 만나며 생겨난다. 고급 취향과 저급 취향이라는 기준으로 취향이 명확히 구분되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 취향의 우열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로써 평론계는 혼란스러워졌다. 평론가의 취향은 한 개인의 취향에 지나지 않게 됐으며, 평론가가 작품에 대해 평하는 것은 취향의 강요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의식을 가지고 예술성이 다분한 영화를 평하는 이를 고리타분한 평론가로 치부해버리고, 대중적 시각으로 영화를 평하는 이를 무능력한 평론가로 깎아내린다. 

하지만 기사를 마무리한 지금 나는 평론가의 취향이 그저 한 개인의 취향에 불과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기사를 쓰며 만났던 이들은 누구보다 영화를 순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영화가 대중화되기 이전부터 프랑스 문화원을 들락거리며 영화를 찾아다녔으며, 호기심만으로 만 편 넘는 영화를 보기도 했고, 아직도 영화를 각별한 애정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특히 한국 사회의 평론가에게 영화는 더욱 각별해 보였다. 대중 문화를 숨 쉬듯 접해온 현세대는 언제 어디서든 영화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지금의 평론가는 영화의 불모지에서 직접 작품을 찾아 나서야 했던 시대를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현학적이라 치부되는 평론가의 언어마저도 영화에 대한 그들의 애정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평론의 언어를 고상한 것으로 여긴다. 대중 앞에서 평론가가 고심해서 쓴 단어는 현학적인 단어로, 긴 숙고 끝에 완성된 평론은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한 글로 변화한다. 그러나 이들의 수사적 표현이야말로 평론가가 영화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중세 유럽에서 사랑을 노래했던 시인 트루바두르는 자신의 시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랐다. 시가 응당 그것이 표현하는 사랑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이들은 기쁨으로만 치환될 수 없는 사랑을 쉽게 그리는 것을 경계하곤 했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귀했던 시절부터 영화를 동경해온 평론가에게 영화는 여전히 단순화될 수 없는 예술이다. 지금의 평론가는 중세의 트로바르 클루처럼 영화를 닮은 섬세한 언어로 영화를 그려내고자 했을 뿐이다.

평론가의 순수한 시선은 발견되기 어려운 문화적 가치를 조명해낸다. 나는 취향을 강요할 수 없는 시대에 평론가의 취향만은 외면받지 않았으면 한다. 이들의 취향이 우월해서가 아니다. 항상 사람들에게 잊히고 영화사 속에서 기억되지 못 할 뻔했던 작품을 조명해줬던 건 이들의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배급이 흥행을 결정하며 예술의 영역에서 멀어져가는 영화계에서 순수한 시선만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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