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이 시대의 악당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영웅의 적인 악당에 불과했던 곽철용이나 조커를 눈여겨 봐야 할 만큼 우리 삶은 팍팍해졌다. 눈여겨볼 필요가 없다면 아직 살 만한 사람일 것이다. 근래의 선한 주인공 캐릭터를 전복시키고 있는 ‘곽철용’부터 보자. 곽철용 패러디 영상이 유튜브에서 화제를 모을 때 뒤늦게 언론 미디어에서도 그 배경에 관한 몇 가지 분석이 있었다. 하나는 회고와 향수였다. 영화 〈타짜〉의 세 번째 시리즈가 흥행에 실패하게 되면서 팬들이 지난 시리즈의 작품을 다시 소환해 향수를 달랬다는 점 때문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놀이 문화론이다. 젊은 세대가 과거의 영상 속 캐릭터를 불러내는 것은 하나의 인터넷 놀이 문화라는 분석이었다. 그런데 그 소환된 캐릭터가 주인공 고니(조승우)가 아니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곽철용은 극 중에서 잠깐 등장하는 조직 폭력배의 보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물론 스타가 간혹 카메오로 출연하는 경우도 있는데, 김응수라는 배우도 그렇게 톱스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강제소환 된 것은 곽철용이라는 캐릭터 때문이다. 무수한 캐릭터가 다시 소환되지만 이렇게 화제가 되는 것은 뭔가 다른 문화적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비록 옳든 그르든 말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곽철용은 흙수저 출신의 좌절된 욕망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17살에 달건이(건달) 생활을 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말한다. 만약 그가 집안이 좋고 배움의 기회가 많았다면 건달 조폭 생활을 전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비열하고 야비한 조폭 두목이 아니라 나름 의리와 인간애를 바탕으로 사람과 조직을 관리한다. 또한 어록을 통해 순정 마초라는 닉네임을 얻었듯이 외모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강조한다. 학벌이 없고, 못났고 직업이 변변치 않아도 사랑하는 마음만은 누구보다 떨어지지 않는데, 곽철용이 사랑하는 여성은 잘생겼다는 이유로 고니를 따른다. 오히려 주인공 고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기는 물론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더구나 곽철용은 고니에게 호감을 느끼고 배려를 해주는 과정에서 죽게 된다. 누가 선한 주인공인지 순간적으로 헛갈릴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영화 〈타짜〉를 많이 언급해도 고니라는 캐릭터의 팬들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완전히 곽철용 팬들이 압도적이다. 곽철용은 깡패고 선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원칙을 지키며 철학을 설파한다. 그 때문에 비록 그가 영화에서는 고니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의리 있는 보스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심리는 흙수저의 좌절된 욕망이 그를 소환했다고 보게 하는 이유다. 

타짜의 고니는 비록 노름꾼일지라도 기득권 안에 있다. 조커를 원수로 이를 가는 영웅 배트맨처럼 말이다. 영화 〈조커〉는 그동안 배트맨 시리즈에서 단골로 등장했던 악역 조커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만약 곽철용이 영화로 제작된다면 이런 방식이 아닐까 싶게도 한다. 영화 〈조커〉의 위대한 점은 단순히 악역을 전면에 등장시켰기 때문만은 아니다. 조커가 악인, 예컨대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신경장애인일 수 있다는 점을 환기했다. 조커의 트레이드마크는 광대 분장에 예측할 수 없이 튀어나오는 웃음이다. 영화 〈조커〉의 제작진은 그가 단지 인위적으로 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웃음이 튀어나오는 틱 장애를 가진 코미디 스타 지망생으로 그렸다.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웃음 때문에 주변이 따가운 시선을 감내하며 꿈을 향해 가지만 결국 사회적인 모순 때문에 범죄자가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이 점이 진부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범죄가 사회적인 구조 때문에 발생한다는 관점은 오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동안 나쁜 놈은 그냥 나쁜 놈이라는 사이코패스 같은 악인 캐릭터가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점을 생각해보면 신선하게 느껴진다. 사실 불우한 환경의 조커가 아니라고 해도 누구나 그런 처지에 있을 수 있다. 신경장애라는 것이 비단 부잣집 태생이라고 없을 수는 없다. 그들 또한 장애인 차별을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차별의 사회에 대한 범죄의 유혹에 시달릴 수 있다.

한편으로, 울음도 삼켜야 하는 코미디언으로 그를 등장시킨 이유도 중요하다. 감독은 그를 자신의 의지와 감정과는 별개로 항상 다른 이들을 기분 좋게 하는 감정노동자로 환치시켜냈다. 그런데 그가 본격적인 악당이 되면서 그의 감정노동은 상황을 초월하게 된다. 조커는 배트맨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심각해”(Why so serious?) 그래, 배트맨은 항상 심각하다. 왜 심각할까. 설마하니 뭔가 있는 듯이 멋있게 보이려는 것일까. 지금이야 웃음이 각광받는 예능의 시대지만 그것을 경멸한 시대도 분명 존재했으며 그것은 악으로 취급받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선의 세력이라고 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무수한 사제들을 독살시킨 금서는 바로 웃음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다. 왜 웃음에 관한 책을 금지했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내용 자체에서 함량 미달이라 바람직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들은 중세질서의 핵심 원칙인 엄숙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 엄숙주의야말로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가진 게 많기 때문에 그것을 잃을까 봐 심각한지 모른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질까 봐 노심초사를 하니까 심각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 오히려 심각할 이유가 없다. 특히 가지려 하지 않을수록 더욱 초월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욕심이 없는 자라고 하지 않던가. 조커는 돈을 탐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가진 자들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관심이 있어 보인다. 돈은 부하들을 통솔하기 위한 수단, 그러니 조커는 항상 웃음을 터트린다. 심지어 자신의 계획이 틀어져도 나아가 자신이 죽어가는 데도 목숨에 연연해하지 않는 듯싶다. 

기존의 질서라는 것이 빨리 무너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 기득권 질서에서 배제된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악당이 하듯이 총을 들거나 폭력으로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은 또 다른 소수자들을 희생시키고 약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에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문화적 변화를 통해 입법과 제도를 통해 그 방향성을 꾀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 공화정의 원리고 국민주권주의의 핵심 원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커의 경지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약자들에게 말할 수 없다. 그리한다면 너무 무책임하거나 현실의 생존 문제를 도외시하는 것. 모두 범죄자가 되라고 하는 셈일 수 있다. 감정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뭐가 그렇게 심각하냐고 물을 수는 없다. 

한동안 유행한 악당들은 기득권층에 많았다. 인기 드라마에서 악역으로 주목받았던 남녀를 꼽으라면 〈태조 왕건〉(2000)의 궁예(김영철), 〈하얀 거탑〉(2007)의 장준혁(김명민), 〈선덕여왕〉(2009)의 미실(고현정), 〈추적자〉(2013)의 서동환(박근형), 〈정도전〉(2014)의 이인임(박영규) 등이 있는데 조커나 곽철용과 같이 약간 희극적인 캐릭터를 꼽는다면 〈베토벤 바이러스〉(2008)의 강마에(김명민)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이고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의 악성을 떠나 주옥같은 어록으로 회자됐다. 물론 이런 악당들은 대개 행동거지의 여유가 있다. 오히려 보수적인 기득권을 가진 악인들이었기에 자신들이 가진 힘을 통해 약자들을 괴롭히고 자신들의 이익을 더욱 강화하는데 골몰한다. 즉, 여유가 있는 것 같지만 심각하다. 

마찬가지로 영화 〈조커〉에서 배트맨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 토머스 웨인은 고담시를 염려하지만, 그것은 약자가 아니라 가진 자들을 위한 질서가 무너질 것에 대한 염려였다. 그가 바라는 것은 부의 양극화 구조를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에 불만을 품은 자, 일탈자들을 처치하는 것이었다. 사회복지정책의 무분별한 철회가 범죄자를 더 발생시킬 수 있음에도 토머스 웨인은 그런 인과 관계에는 관심이 없다. 겉으로는 여유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여유가 깨질까 봐 항상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대개는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위로 더 큰 부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가진 악당들이 유행했던 것은 어쩌면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은 중산층의 욕망을 대변한다. 위로 본다면 더 큰 부자와 권력자는 많으며 세계 대부호를 본다면 더욱 말할 것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는 악당의 삶에 더 경도됐는데, 이런 중에 선하게 살고 싶어도 악하게 살게 만드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은 상대적으로 외면됐다. 오히려 조커와 곽철용처럼 선한 명분을 내세운 영웅들이 휘두른 폭력에 당하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지는데 말이다. 

고니가 휘두른 폭력은 정말 선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배트맨이 지키고자 했던 선의 질서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자신이 선한 세력이자 영웅이라고 고집하는 순간 악의 세력과 악당은 탄생한다. 이는 영화 〈스타워즈〉에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파드메 아미달다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며 루크 스카이워커와 레이아 오르가나를 낳는다. 하지만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은하 공화국의 제다이 기사단에서 퇴출당하고 만다. 선의 수호자였던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제다이 기사단의 모순에 분노한다. 공화국이 사랑을 죄악시하다니. 이에 응징하고자 그는 제국군의 다스 베이더로 거듭난다. 결국 선에서 악이 탄생한 셈이다. 제다이 기사가 된 아들 루크 스카이워커는 자신을 존재하게 한 아버지를 악인이라며 처치해야 하는 상황에 갈등한다. 자신이 선이라고 자임해도 민주 공화정의 원리에 따른 다양성을 용인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관이나 문화 가치체계를 절대화할수록 다른 존재들을 악으로 규정하기 쉽다. 사적의 욕망이 여전하거나 더 강화하려는 의지가 클수록 이는 비례할 가능성이 높다. 그 가진 것이 비록 적은 것이든 많은 것이든. 상대적 악은 세대론과도 맞물린다. 화무십일홍, 지금 당장에 역사의 주인공이 될지라도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때 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거꾸로 새롭게 등장하는 미래세대는 언제나 악으로 규정될 가능성이 크며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문화적 변화가 악이 아니었음을 증명할 뿐이다. 그 미래세대 역시 다시금 부상하는 미래세대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때 악이 되는 것은 인류의 운명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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