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김채영 기자 kcygaga@snu.ac.kr
삽화: 김채영 기자 kcygaga@snu.ac.kr

며칠 전 우연히 20년도 더 된 영화 〈꽃잎〉을 보게 됐다. 〈꽃잎〉은 한때 테크노 전사로, 이제는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으로 더 기억되는 가수 겸 배우 이정현의 데뷔작이다. 배우 추상미, 설경구, 박철민의 앳된 모습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고 나면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날이 또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라고 시작하는 김추자의 노래 ‘꽃잎’을 부르는 소녀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는다. 아침에 들었던 노래가 하루를 지배하듯이, 며칠째 ‘꽃잎’의 멜로디에 지배당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을 증언한 이 영화의 원작은 최윤의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다. 원작 소설에는 ‘소녀’ ‘남자’ ‘우리’라는 다층적인 서술자들의 증언이 교차돼 있다. 다큐멘터리 영상을 삽입해 1980년 광주를 직접 환기하는 영화와는 달리, 소설은 매우 암시적이다. 실성한 소녀의 기억은 검은 휘장에 가려져 있다. 파편적인 기억들, 혼란스러운 의식의 흐름과 내적 독백을 통해 소녀는 ‘그날’ 총상을 입고 죽어가던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던 기억과 마주한다. ‘남자’는 어느 날 자기를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온 소녀와 동거하게 되고, 점차 소녀의 몸과 정신에 각인된 상처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국가 폭력에 의해 의문사한 친구의 누이인 소녀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이때 ‘소녀’ ‘남자’ ‘우리’는 모두 ‘그날’ 이후 살아남은 자들이다. ‘소녀’는 희생자의 유족이면서 국가 폭력의 직접적인 피해자이자 목격자다. 소녀는 자신의 기억과 대면하고, 죽은 오빠를 찾아 정처 없이 무덤가를 떠돌면서 죽은 엄마와 오빠에 대한 끊임없는 애도를 수행한다. ‘남자’는 처음에는 소녀라는 타자를 폭력적으로 대했지만, 결국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것에 감염된 듯 자신 또한 알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되는 인물이다. ‘우리’는 친구 누이에 대한 부채감을 갖고 소녀를 찾아다니지만, 늘 한발 늦는다. 이들은 제각기 다른 경험과 기억, 정체성을 가졌지만 공통적으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지니고 있다. 

또한 작가는 소설의 프롤로그를 통해 ‘당신’을 ‘오빠’라 부르는 소녀를 만난다면, 그녀를 무서워하지도, 무섭게 하지도 말고, 그저 그 얼굴을 관심 있게 바라봐 달라며 독자에게 부탁의 말을 건넨다. 독자를 ‘당신’으로 호명하면서 독자 또한 윤리적 주체로서 추모를 수행하게끔 하는 것이다. 책임감을 부여받은 독자는 소녀의 독백에 귀 기울이고, 다층적으로 서술된 이야기의 조각을 이어붙이면서 ‘그날’의 진실, ‘그날’이 남긴 상흔을 확인하게 된다.

얼마 전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골프장 영상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지만, 알츠하이머 진단 등을 이유로 재판에 불출석한 그가 건강한 모습으로 골프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광주 학살에 대해 모른다”라며 자신은 광주 학살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 시대는 갔지만, 아직도 “그날이 또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이들은 한 소녀, ‘나’ 혹은 ‘당신’일 수 있고, ‘우리’일 수도 있다. 다시, 소설의 프롤로그로 돌아가 나 또한 그 소녀를, 그날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당신’임을 상기하게 되는 밤이다.

유예현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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