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학과 석사과정 정진영
지리학과 석사과정 정진영

일주일에 두 번은 학교를 떠나 혜화로 간다. 나는 혜화 마로니에 공원 부근에 자리한 ‘노들 장애인 야학(노들야학)’ 활동가다. 노들야학은 차별이 만들어낸 장애인 교육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93년 설립됐다. 지금도 여전히 일상을 함께하며 일하고 공부하고, 수많은 차별에 투쟁해나가고 있다. 나는 작년부터 노들야학에서 함께해왔다. 이 지면에서는 노들야학에서의 단상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노들야학에는 다양한 학생들이 있다. 그중 장미(가명)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가끔 하곤 하신다. 그가 다른 학생들과 맺는 관계는 다소 독특하다. 어떤 학생에게는 한없이 위계적이시기도 하고, 또 다른 학생에게는 복종적으로 보일 만큼 모든 걸 양보하시기도 한다. 하루는 내가 학생들과 사진을 같이 찍자고 제안했는데 장미가 특정 학생에게 “너는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그러다가 또 다른 학생인 정남(가명)에게는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자연스레 내어주셨다. 정남이 장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들어오자마자 자기 자리를 양보하신 것이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분은 대체 왜 이러시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교사 회의에서 다른 활동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통해 나름대로 해소됐다. 다른 활동가의 말에 따르면, 장미가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위계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장미는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종사자-거주인’이라는 단편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를 맺고 오랫동안 살아왔다. 동시에 시설 내에서 거주인 간의 위계적인 관계 또한 지속적으로 문제가 돼 왔다. 그런 관계들이 만연한 공간 속에서 오랜 시간 지내다 보니 위계적 인간관계를 깊이 체득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사당동 더하기 25』(조은)라는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저자인 조은은 빈곤을 미래에 대한 계획 부족, 역사의식의 결여, 혼전 동거 등과 같은 빈곤 ‘문화’의 결과로 설명하는 주장에 반박한다. 이에 대해 조은은 빈곤 ‘문화’가 아니라 ‘빈곤’이 있을 뿐이라고 역설한다. 빈곤 문화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이다. 조은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설명하는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를 가져오는 구조에 주목하게 됐다. 빈곤 문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빈곤이 있을 뿐이며 가난을 설명하는 데 가난 그 자체만큼 설명력을 가진 변수는 없다. ‘가난의 구조적 조건’이 있을 뿐이다(304쪽).” 

노들야학과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텍스트가 떠오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장미와 같은 노들야학의 학생들과 만나며 나는 가끔 ‘왜 이렇게 행동하시지?’, ‘왜 이렇게 말씀하시지?’하는 의문들을 가지곤 했다. 그리고 그런 의문을 학생 개인의 결함이나 부족, 혹은 장애 특성의 탓으로 돌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장미와 같은 학생들이 가지는 많은 특성과 문화들은 차별의 결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미는 왜 그런 태도를 체득할 수밖에 없었을까. 장미는 왜 그런 관계가 만연한 공간 안에 놓였어야만 했을까. 장미는 왜 지역사회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시설에 가야만 했을까. 그곳에서 그의 삶은 대체 어떠했을까. 이러한 질문의 답들에는 차별과 배제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노들야학 교사가 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홍은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자포자기와 냉소의 지배 아래 살다가 노들에 왔고, 다르게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쉽지 않은 일 같다. 그들은 나와 떠들며 웃다가도 자신의 골방으로 돌아가면 죽음을 기도했다(168쪽).” 노들야학에서 시간을 보내며 나는 그들의 삶을 상상한다. 자포자기와 냉소의 지배 아래 살던 삶. 모든 것을 제한받으며 살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살아온 시간들을 그려본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장애’라는 특성 중 일부는 차별과 배제의 ‘결과’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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