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진 사진부장

나는 어릴 때부터 고민은 많지만 고민을 끝맺는 것에는 약했던 사람이다. 문득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해 ‘왜 그럴까’를 끝도 없이 되묻다가, 결국 ‘답이 없는 건 아닐까’라며 시시하게 끝을 내곤 한다. 초등학생 때 도덕을 왜 배우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흔히들, “도덕시험은 제일 착한 것 고르면 돼”라고 말하는데 맞는 말 아닌가. 우리는 어릴 때부터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에 대해 배워왔고, 도덕시험은 그걸 고르기만 하면 되는 시험이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해서 도덕을 배워야 할까. 도덕을 공부하는 것과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인가? 내가 이기적인 행동과 도덕적인 것 사이에서 갈등할 때, 곧바로 후자를 택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지기 때문인가? 우리는 도덕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의 이유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와는 다를지라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들도 많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잘못됐다'라는 비판을 할 자격이 내게는 없는 것이 아닐까. 끝맺지 못한 나의 짧은 고민은 시시하게 잊혀졌다.

이번 주에는 정말 많은 일이 빠르게 일어났다. 몇 번의 보도가 있었고 몇 편의 사과문이 올라왔으며 누군가는 사퇴했다. 또 누군가는 그동안 가져왔던 믿음에 의문을 표하게 됐으며, 누군가는 분노했다. 학내의 반응은 말 그대로 뜨거웠다. 그러나 ⌈내일⌋의 포스터는 여전히 학교 곳곳에 남아있었고 이 뜨거운 감자에 대해 친구들은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파란 가을 하늘은 잔잔하기만 했고, 모니터 밖의 서울대는 참 여느 때와 같이 고요하기만 하다. 나는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뜨거운 반응을 작은 화면 속에서야 확인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익명’이라는 가면을 쓴 많은 글이 올라왔다. 익명의 A씨는 B씨에 의해 ‘대깨내’가 되기도 하고 C씨에 의해 ‘비꿘’이 되기도 했다. 반대로 B씨는 A씨에 의해 비꿘을 몰아내려는 ‘꿘’이 됐다.

‘익명’이라는 두 글자 뒤에 편히 숨을 수 있는 그곳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논란의 당사자들에 분노하고, 제보자에 분노하고, 『대학신문』에 분노하고, 댓글을 쓴 이들에 분노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학내 사안에 대한 ‘진짜 진실’을 밝히라는 글에 많은 이들이 호응하기도 했다. 『대학신문』이 취재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보도하면 판단을 내리는 건 독자의 몫이다. 그 둘의 역할이 다름을 인정하지만, 익명 게시글을 읽으며 느낀 이질감은 쉬이 넘길 수가 없다. 『대학신문』의 보도 기사를 언급한 글의 댓글 중에는 “사적인 대화방에서 저렇게 말 안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냐”라며 “무서워서 SNS 마음대로 못 하겠다”라는 내용도 있다. 이 세상에 깨끗한 사람이 없으니 다른 이의 잘못도 눈감아줄 수 있어야 하는가. 그의 분노는 대체 누구를 향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분노는 쉽지만 참 어렵다. 시간이 지나면 분노의 이유는 사라진 채 감정만 남곤 한다. 감정만 남은 분노는 갈 길을 잃은 채 문제의 본질을 좇기보다는 가까이 있는 이들을 향하게 된다. 이를테면 댓글을 남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그들은 쉽게 나와 반대 진영에 있는 사람이 되고 또한 쉽게 무식한 사람이 돼버린다. 그들의 분노가 오로지 쉬운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 그들을 판단하고 단정지을 자격이 있다고 단언할 수 없으니 말이다. 다만, 조금은 어렵게 분노해줬으면 좋겠다. 남아있는 감정만을 토로하기보다 분노의 이유를 붙잡아주길 바란다. 고요한 서울대가 작은 화면 속에서도 평온하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 더, 잘 분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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