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미대통령의 이라크 파병 요청은 태풍 ‘매미’가 패어 놓은 민심의 주름살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올 경제 성장률을 몇 퍼센트 포인트 끌어내릴 것이라고까지 전망되는 태풍의 엄청난 피해 앞에 망연자실해 있는 마당에 수천 명에서 만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그것도 자비로 파병해 달라니 한숨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약소국의 설움인지 운명인지 벌써부터 파병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유력한 여론 매체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이러한 파병 불가피론은 성급할 뿐 아니라 이들 주장이 흔히 내세우는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현 상황에서 국익이라 할 때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는 북핵 문제의 안정적 해결이다. 단기적으로 보자면 태풍 피해를 신속하게 복구하여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선결문제다. 성급하게 터져 나오고 있는 일각의 파병 불가피론은 이 두 문제를 모두 외면하고 있다.


우선 당장 수해 복구에 전념해야 할 현재의 우리 정부로서는 수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대규모 파병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더구나 이라크의 현상황을 고려할 때 전투병력을 파견하는 것은 명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위험하다.


미국의 파병요구에 응하는 것이 북핵문제 해결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논리도 근거가 약하다. 북핵문제는 북한의 일방적 도발 의지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고,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과 맞물려 발생한 것이다. ‘악의 축’ 발언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라크 문제는 북핵문제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 결국 한국군의 대규모 파병은 미국의 일방주의적 압박정책에 한국정부가 적극적으로 공동보조를 취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는 북한의 강경노선을 자극할 가능성이 크며, 결과적으로 북핵문제를 둘러싼 상황은 악화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정부가 한국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것은 미국의 일방주의 정책이 일정한 한계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기도 하다. 잘못된 길로 나가 어려움에 빠진 친구를 진정으로 돕는 길은 쓴소리를 하더라도 그 길에서 빠져 나오도록 하는 것이지, 그 길로 계속 가는 데 동조하고 조력하여 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제는 문제의 해결을 국제사회의 공론장에 개방할 때다. 유엔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우리 정부는 이라크의 치안상황 해결과 과도정부 구성에 관한 안건을 유엔에 상정할 것을 미국 정부에 권고해야 한다. 파병 문제에 우리가 성급하게 나설 이유가 없다. 유엔에서의 논의 진행에 우리 정부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면 된다. 국제적 공론의 합의 하에 이루어진 평화유지군의 파견이라면 적정 규모에서 고려해 볼 수 있는 문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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